여성과 일
최종 면접에 다섯 명의 면접관이 들어왔다. 두 명은 기존에 알던 사람들이었고 세 명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입사하면 가까이 일하게 될 부서의 책임자들이라고 했다.
왜 미국에서 일하고 싶어요?
파트너십 부서에서 온 호주 출신 면접관이 물었다. 면접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조심스러웠다. 면접관이 기대하고 있을 솔직하고도 개인적인 답변을 하려면 사회적인 문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을 고르고 골랐다.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이왕이면 제일 큰 시장에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게 첫 번째 이유고요. 두 번째는 여성이 성장하기에 여기 환경이 더 좋아서요.”
한국 내 구단 및 협회의 홍보, 마케팅 부서에는 여성들이 많아지는 듯하다. 유튜브 콘텐츠의 카메라 뒤에서 여성 피디들의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하지만 정작 조직에 중요한 결정을 하는 자리에는 여전히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여성 리더십을 찾아보기가 힘든 환경. 그게 미국 시장에 도전하게 된 큰 이유였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데는 이전 직장 경험이 한몫했다. 주니어 때는 남녀가 상관이 없다. 학교에서 뭘 얼마나 배웠든 하얀 도화지 같은 상태로 입사하기 때문에 똑똑하고 빠릿빠릿하면 성장한다. ‘내가 하얀 도화지구나’를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대게 1년 내에 몇 차례 실수하며 깨닫는다.
중간 관리자가 되면서는 상황이 달라진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책임질 일도 늘어나고 관리하는 예산도 늘어난다. 그리고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적인 존재가 된다. 실력이 뛰어난 데 정치에 관심이 없는 중간 관리자는 권력에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 영문 모르고 이용당한다. 반면 선별적으로 이용당하기를 허용하는 사람이 있고 공격적으로 세를 넓히는데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공격적으로 세를 넓히기로 작정했다면 한국에서는 술을 잘 마시는 게 좋다. 회식 문화와 영업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직장인들이 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술을 좋아하는 리더십이 많은 회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임원들이 술을 좋아하던 회사에 다니며 회식마다 저녁만 먹고 사라지던 나로서는 어째서 새벽까지 남는 사람이 의리 있다는 말을 듣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다음날 제대로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의 잔을 부딪히며 무슨 정을 쌓는 건지 경험해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보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게 짠짠 거리는 것이 조용히 할 일을 잘 해내는 것보다 도움이 되는 것 같더라.
설령 사내 문화가 괜찮다고 해도 술자리에서 중요한 영업이 이루어진다면 그 자리에 가지 않는 사람은 실적이 저조한 사람이 된다. 결국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인 것이다. 회사 사람들과 마시거나 거래처와 마시거나.
어떤 사람이 될지는 본인의 선택이며, 다니고 있는 회사를 인수하지 않는 이상 어차피 직장인의 수명은 길어야 60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거기서 거기다. 예를 들어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공격적으로 세를 넓히는 전략보다는 쓸 수 있는 패를 많이 쌓아 선별적으로 이용당하는 전략이 적합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다니던 직장을 떠날 때 다짐했다.
'정말 다니고 싶은 회사가 아니면 조직생활은 이게 끝이다. 만일 내 발로 어느 회사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때는 중요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올라가 보자.'
여기서 최선에는 정치도 포함된다. 조직 내의 정치를 배우지 못하면 더 올라가지도 못할뿐더러 같이 일하는 후임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입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전 직장에서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정말 올라가고 싶다면 나와 페르소나가 비슷한 상사를 만나야 한다. 상사가 나를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사내 정치판에서 팀을 지킬 수 있는 상사를 만나는 건 복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상사라고 해도 나와 성향이 너무 다르면 상사의 정치적인 언어를 배울 수가 없다. 가장 무거운 무게 추를 일에 두고 필요에 따라 상대와 춤을 출 줄 아는 여성이 임원으로 있는 조직에 가고 싶었다. 내가 보고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미국에서의 취업이 한국에서보다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여성이 큰 직책을 맡으면 기사가 나는 곳보다는 이미 여성 리더가 많은 곳에 가고 싶었다.
“외국인이라서 취업에 불리할 거라는 걸 알고 왔어요. 제가 여성인 걸 바꿀 수는 없지만, 외국인으로서의 핸디캡은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일단 진입하고 나면 여기가 조금 더 공평한 운동장인 것 같아서 한번 해보고 싶어요.”
국내 스포츠 관련 조직의 단체 사진을 보면 구성원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소리 없는 사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한 손을 번쩍 올리고 주먹을 불끈 쥐고 카메라가 있는 방향을 응시한다. 천편일률적이고 강압적인 이미지, 수십 년간 굳건하게 전해져 내려오는 그 포즈가 한국의 스포츠 산업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곳곳에서 변화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그분들의 노고가 좋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고, 곧 더 좋은 문화로 나타나게 될 거라고 믿는다.)
램스에는 풋볼 관련이든 사업 관련이든 여성 리더십이 많다. 회사 홈페이지에 가면 임원들 사진이 나오는데 절반 정도가 여성이고 나의 보스도 그중 한 명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하면서도 나보다 10년 앞서가는 사람이라 같이 일하면서 많이 배운다.
겁쟁이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진 속에서 화이팅을 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미국에 왔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여성 리더십이 많은 회사에 들어와 내가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상사를 만났다.
어떻게 바늘 구멍을 뚫고 들어왔는지는 이어질 이야기에서 차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