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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에몽의 주머니는 없지만

30대 중반, 갑자기 유학길에 오르다

by 날으는돌고래 Mar 18. 2025

램스(NFL 팀) 입사가 확정되고 온보딩 절차를 밟던 어느 날, 이제는 기록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스포츠 관련 직종은 미국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많다. 빅테크 회사들은 좋은 인재를 찾기 위해 외국인을 많이 고용하기도 하지만, 이 업계는 정원이 적은 데다 실력 있는 아이들도 공짜로 일하겠다고 줄을 서 있어서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대한 벽에 부딪혔지만 주저앉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될 거야!


Right Person, Right Timing.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때 만나는 것. 돌아보면 이게 지금까지 내 여정의 전부였다. 늘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끊임 없는 도움의 손길을 통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시리즈는 외국인 노동자의 취업기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인연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모험에서 첫 인연을 만난 건 2023년 8월, 뉴욕행 비행기 안에서였다.



옆자리에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도라에몽 티셔츠를 입고 있어서 정감이 갔다. ‘나도 도라에몽 좋아하는데.’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그 거대한 몸뚱어리를 둥실 띄웠다.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지자마자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감이 급습했다. 영화를 봐도 음악을 들어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학부를 졸업한 지 10년이 되던 해에 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만에 유학길에 올랐다. 전공은 스포츠 경영. 운동이라고는 가끔 하는 필라테스가 전부고 특정 스포츠에 죽고 못 사는 열혈 팬도 아니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했다.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축제 회사와 전시 회사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일을 통해 보람을 느꼈다. 더 큰 전시를 하게 될 줄 알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고, 회사는 그 시기를 버티기 위해 기업 마케팅 대행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기업 프로젝트들로 이력서는 화려해졌지만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자괴감이 들었다. 일을 하는 이유가 굉장히 중요한 나로서는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산업을 기준으로 일을 정의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산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다. 오프라인 이벤트, 소셜미디어, 뉴미디어, 사업 개발. 10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길렀다.


나에게 스포츠 산업은 삼대가 같이 즐길 수 있는 마지막 플랫폼이었고, 사람들을 가장 폭발적으로 모이게 할 수 있는 곳이었고, 내가 가진 것들을 전부 활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에 의아해하던 지인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는 않았다.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고, 만약 해내게 된다면 설명할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비행 내내 막막함에 눈을 질끈 감았던 이유는 아마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희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심히는 해보겠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확률이 99%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해보고 싶었을 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던 건지 황당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 건 분명 행운이었다.



뉴욕 공항에 내릴 무렵,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병원 가기 쉽지 않은 곳에서 나까지 아파질까봐 걱정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관제탑에서 게이트 배정을 늦게 해주는 바람에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가 공항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남자의 기침이 제발 멈추길 바라며, 승객을 가득 실은 비행기가 견인되길 기다리며, 도라에몽 티셔츠를 입은 그녀와 14시간 만에 처음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난자 연구에 20대를 바친 새내기 박사였다. 미국 대학원으로 포닥을 하러 간다고 했다.

“비행기에 타서 김동률의 출발을 듣는데 너무 우울하더라고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겠어요. 그냥 열심히 해봐야죠.”


안개가 자욱한 정글 초입, 혼자가 아니라서 위로가 됐다. 우리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지만 아주 가끔 연락하고 만난다. 그녀는 뉴헤이븐에서 밤낮없이 연구를 하고 어린 학부생들과 씨름하지만 가끔 책과 영화로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무엇보다 도라에몽을 좋아한다.


나에게 그녀가 특별한 이유는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것만 같은 연구를 해서가 아니다. 원하는 연구를 더 잘 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곳에 발을 내디딘 용기, 완벽하지 않은 날들 가운데 내일을 기다릴 줄 아는 의연함. 그런 모습이 좋다.


도라에몽의 주머니는 만물상자 같아서 말만 하면 필요한 모든 것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그날 공항에서 ‘우리에겐 그런 주머니가 없다’는 걸 완전히 받아들였던 것 같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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