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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Jul 11. 2022

「헤어질 결심」을 봤다. 아련했다

해준이 꿀밤 딱 대...


「헤어질 결심」을 보고 난 다음 이 영화로 글을 쓴다면 무엇을 중심으로 쓸지 고민이 많았다. 고민 끝에 내린 “결심”은 영화의 제목을 중심에 두기로 했다. 작중 서래는 두 번째 남편을 만난 이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남자와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하림의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네」가 생각나는 대사다. 서래의 첫 번째 결혼과 두 번째 결혼에는 그녀의 사랑은 없고 배우자의 욕망밖에 없다. 계약 관계에서는 사랑이 없지만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해준과의 만남에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것은 해준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안은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아내와의 관계가 지루해졌다. 그런 그의 삶에 등장한 서래는 해준의 일상을 변화시킨 여자였다. 이 영화가 일상을 벗어나 불륜을 저질러라는 걸 얘기할까? 그런 건 전혀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가 조명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서래가 처음 만난 남편 기도수는 소유욕이 강한 사람이다. 자신의 모든 물건에 자신의 이니셜을 각인하고, 서래의 몸에도 이니셜로 문신을 새긴다. 그는 서래의 몸에 안 보이는 곳만 골라서 폭행을 일삼던 사람이다. 그래서 서래의 첫 번째 결혼은 기도수의 소유욕만 존재했다. 그런 서래에게 해준이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서래의 말을 빌리자면, 해준은 “현대인치고는 품위 있는 사람”이다. 해준은 서래를 위해 쉬운 말로 얘기하려고 하고, 서래의 언어를 배우고, 서래보고 담배를 끊으라고 하기보다는 참아주는 사람이며, 서래의 손이 거친 걸 알고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사람이다. 해준은 나이가 들었음에도 편한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다. 늘 재킷을 입고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비가 오는 날에는 코트를 꼭 걸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서래는 자신에게 진심을 내비치는 해준에게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서래는 1부(기도수 살인 사건)에서 해준에게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는다. 1부에서 서래는 해준에 대한 호감이 있지만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자 해준의 휴대전화에 있는 녹취록을 모두 지우고 해준의 집 벽에 붙어 있는 기도수의 사진을 태운다(자기 사진 몇 장은 남기고). 서래의 이런 행동과 자신의 감정을 해준에게 말로 전달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둘 사이의 관계는 헤어짐에 이른다. 

둘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서래는 해준이 모르게 대화를 녹음한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의 옆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앉는 순간 “마침내” 어떻게 될지 알았을 것이다. 해준은 서래에게 자신을 이용해서 수사망을 피해 간 것에 관해 말한다. 그러자 서래는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해준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품위 있다고 하셨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저는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저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의 행적은 참 아이러니하다. 자신의 품위가 경찰로서의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의 수사 방식은 너무나도 허술하고 용의자를 끝없이 배려해 준다. 피해자의 시신이 있는 곳에서 피해자의 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하고, 그런 용의자를 위해 동료 형사들도 놀랄 정도로 비싼 초밥을 시켜준다. 오죽하면 자신을 존경하는 수완이 다른 용의자와 차별한다고 말할 정도니까. 잠복 수사를 빙자해 그녀의 삶을 훔쳐보며 연모하는 마음을 더욱 키우고, 그녀가 오고 가라고 하면 그녀의 말을 들었던 해준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는 불확실한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자부심마저 포기했다.

하지만 서래가 용의자인 걸 알게 된 해준은 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만약 서래가 용의자인 걸 알면서도 그녀와 만남을 이어나가면, “다른 짭새들과는 다른” 형사라고 서에서 인정받는 그가 다른 놈들보다 더 미친놈이 된다. 또한, 최연소 경감이 될 정도로 실력으로 증명했던 자신의 자부심을 포기해야만 한다. 여기서 서래와 해준의 차이가 드러난다. 서래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지만, 해준은 잃을 게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현대인 해준은 낭만보다는 현실로 돌아갔다. 

해준은 서래를 통해 만성적인 불면증을 해결하고 잡고 싶었던 범인도 잡게 됐다. 서래와 만나는 날 동안은 소위 말하는 ‘행복과 낭만’이 있었다. 그녀의 말을 좀 더 잘 이해하고자 중국어를 공부하고, 그녀와 같이 요리하며 지내는 해준의 모습에는 낭만이 있었다. 원래 해준은 잠복하다가 잠을 못 자게 된 건지, 잠을 못 자서 잠복하게 된 건지 모를 정도로 불면증이 심했고, 소위 말하는 ‘의무 방어전’을 하는 사람이었다(무려 16년 8개월 동안). 해준이 서래를 포기하고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 건, 행복과 낭만을 등지는 선택이다.




둘의 헤어짐 이후 13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해준은 말 그대로 곧 죽을 사람처럼 보인다. 아무 일도 없고 해도 잘 안 나는 이포에 왔지만, 그의 불면증은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준과 헤어진 서래는 임호신과 재혼했지만, 그는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은 항문을 좋아하는 애널리스트가 아닌, 주식 분석가 애널리스트라고 말하는 사기꾼이었다. 서래는 첫 등장부터 자신이 연결해 준 것으로 보이는 중국인(사칠성)에게 뺨 맞는다. 서래의 집은 이전과 비교하면 훨씬 고급스러워졌고, 남편이 비싼 명품을 선물해 주지만, 그녀의 얼굴엔 행복이 보이지 않는다. 서래는 남편에게 “사이는 됐고 이사나 가자.”라고 말하며 이포로 이사 가자고 한다. 

극중 이포라는 공간은 꼭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떠오르게 하는 장소다. 안개가 자욱한 무진처럼, 이포 또한 안개가 자욱하며, 햇빛 하나 잘 들지 않는 공간으로 묘사된다. 정안의 말처럼 이곳의 안개는 사람을 떠나가게 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서래는 이사 온 이유로 ‘안개가 좋아서’라고 말한다. 이포에 온 서래는 해준을 보기 위해 다른 사건의 용의자가 됐지만, 그를 대하는 해준의 태도는 기도수 사건 때와는 조금 다르다. 이전 사건을 통해 그는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생각에 서래의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말하고는 이번엔 알리바이를 단단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윽고 서래를 조사하면서 그녀에게 주는 음식은 초밥에서 명랑 핫도그가 됐고, 그녀가 증거인 자신의 옷(파랗기도 하고 녹색이기도 한)을 불태운 걸 보고 구치소에 넣는다. 

하지만 해준이 서래에 대한 감정을 잊어버리거나 서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번 사건만큼은 여자에 미쳐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수사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다. 해준은 서래와 같이 서래 할아버지의 산에 올라가서 뼛가루를 뿌릴 때, 서래가 기도수를 죽인 것처럼 자신을 죽이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는다. 또한, 산에 오르면서 그녀와 헤어진 날이 며칠인지 명확히 세는 장면들이 그러하다(1부에서 부인이 16년 8개월을 말했던 것과 오버랩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얼마나 만났고, 얼마나 못 봤는지를 명확히 센다는 의미). 이 장면을 통해 나는 해준이 서래가 자신을 죽여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이번에도 이뤄질 수 없었다. 임호신은 죽기 전에 정안에게 전화했었다. 그는 서래가 해준과 헤어질 당시에 녹음했던 파일을 듣는 걸 알고는, 그 사실을 정안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서래는 자신의 엄마가 죽은 뒤에 임호신을 죽인다고 했던 사칠성의 말을 이용해, 사칠성을 찾아가 그의 어머니를 죽이고, 사칠성이 임호신을 죽이게 만든 것이다. 이후 임호신의 전화를 바다에 던져버려 자신과 해준이 불륜 관계라는 증거를 없앴다. 그래서 서래는 이번에도 사건에서부터 도망치고자 자동차를 타고 어딘가로 향한다. 

서래는 자동차에서 해준과 통화하면서 중국어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죠.



1부가 끝날 때 해준이 자신이 붕괴됐다고 말할 때 서래는 붕괴라는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검색해 본다. 그때 서래는 해준이 사랑을 위해 많은 걸 포기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걸 알기에 서래는 다시 해준을 만나러 왔고, 이번에는 그에게서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아 그의 미제 사건이 되고자 한다. 1부에서 해준은 미제 사건의 피해자 모습을 항상 벽에 붙여 두며 그 사람의 눈이 마지막에 무엇을 봤는가에 관해 상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서래는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죽으려고 자신이 죽기로 정해뒀던 바닷가 근처로 간다. 

해준은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서래가 뭐라고 말하는지 몰라 의아해하다가, 서래의 자동차가 주차된 해변에 도착해서 자신과 서래의 목소리를 다시 듣는다. 녹음을 듣다가 멈췄다가 다시 듣는 걸 반복한 해준은, 자신의 신발 끈을 다시 꽉 묶고 그녀를 찾아 바다로 간다. 그 사이 서래는 양동이로 모래를 다 파내고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고는 천천히 파도가 자신에게 밀려오는 걸 기다린다. 그것에 잠겨 죽어도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1부와 2부를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은 마치 안개 같은 사랑으로 그려진다. 잡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잡을 수 없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서 불안하다. 그래도 안개는 눈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랑도 대화하고 눈을 마주치는 순간에 분명히 존재했다. 다만 둘의 사랑의 속도가 달랐다. 1부에서 해준은 서래의 집을 감시하며 수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잉크처럼 천천히 번지는 사람도 있는 거야.


슬픔뿐만 아니라 모든 감정이 그러하다. 누군가에겐 파도처럼 순간적으로 밀려오고, 누군가에겐 잉크처럼 서서히 퍼진다. 서래를 향한 해준의 감정은 파도처럼 빨랐지만, 해준을 향한 서래의 감정은 잉크처럼 서서히 퍼져 자신을 꽉 채웠다. 서로의 세계가, 혹은 이해가 달라서 “마침내” 두 사람의 안개 같은 사랑은 “단일한” 미제 사건처럼, 바닷속에 빠져 아무도 모르게 됐다. 

그래서 영화 안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사랑의 자기희생적인 면모를 강하게 그려낸다. 해준은 서래를 사랑해서 스스로를 ‘붕괴’시켰고, 서래는 해준을 사랑해서 임호신을 죽게 끔 하고, 자신의 목숨마저 끊어버렸다. 영화는 서로 다른 무대와 사건을 통해 서로 다른 자기희생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2개의 영화를 보는듯한 느낌을 줬다. 



이하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



「헤어질 결심」의 단편적인 서사만 보면 ‘천방지축 해준이의 13개월’ 같은 느낌이다. 작중 해진은 철딱서니 없고 최연소 경감이라기에는 너무 멍청한 모습이 많이 나온다. 졸음운전을 하는 모습, 대놓고 바람피우는 모습, 아내에게 뻔한 거짓말을 하는 모습 등등 얘기하면 끝도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날 든 생각은 해진의 머리에 꿀밤 한 대를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화 안에서 정안이 말하는 이 주임이 처음에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후에 등장한 유태오를 보고 이 주임이 남자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왜냐하면 정안이 처음에 이 주임과 했던 얘기는 꽤 수위가 높았기 때문에, 이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안은 해준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심지어 해준이 변기에 앉아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다가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싫어하지”할 때, ‘우리’ 안에 원자력 발전소에서 일하는 자신이 있는 줄 알고 “우리?!” 하면서 말하지만, 카메라가 선을 딱 그으며 해준은 “아니, 경찰.”이라고 말한다. 


「헤어질 결심」의 스크린은 굉장히 변태적이면서도 눈을 즐겁게 한다. 과할 정도로 클로즈업을 하기도 하고, 해준의 말처럼 시체의 시선에서 보이는 구도를 그려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인물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나오는 화면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인물이 녹음을 멈추면 화면 속의 인물도 멈추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작중 가장 좋았던 장면은 해준이 주차한 서래의 차에 서래를 확인하러 가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높은 곳에서 보이는 점 같은 해준과, 오른쪽에서 끊임없이 치고 있는 파도를 담아냄으로써, 마치 멀리서 보면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을 줘서 좋았다. 


영화 안에 선정적인 장면은 없지만 선정적인 소리는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해준이 서래의 향기를 맡기 위해 코로 숨 쉬는 장면이나, 서래가 해준의 수면을 위해 같이 숨 쉬는 장면이 그러했다. 


영화에서는 다양한 전자기기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가령 치매 걸린 할머니가 시리를 부르는 것, 아이폰 안에 있는 오늘 오른 계단수를 확인하는 것, 애플 워치의 녹음 기능, 번역기 등등 말이다. 그래서 작중 해준이 중국어를 배우긴 하지만, 중국어를 활용하는 장면보다는 번역기를 활용하는 장면이 자주 나와서 이게 현대에 외국인과 연애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워 오브 도그」를 봤다. 얘기할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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