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꾸준히 써서 잘 마무리 하고 싶네요
한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논어(論語)』라는 단어를 듣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 자신보다 어른인 사람에게 논어에 관해 듣게 된다. 그러면 대부분 뭔가 좋은 말을 해준다. 가령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라거나,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뭔가 다 알고 있는 말 같고, ‘굳이 이런 말을 알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20대와 30대는 논어라는 책과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모르면 안 되는 시대였다. 성리학이 국가 이데올로기였으므로, 무릇 선비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사서삼경을 달달 외워야만 했다. 현대에는 사서삼경을 외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직업의 정보를 외우고 익히는 시대가 됐다. 자신의 맡은 바를 다 하기에도 벅찬 대다수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서가 아니라 OTT 서비스다. 재밌는 영상을 보며 뇌를 식히고, 다음 날 다시 비슷한 하루를 산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는 사서와 가까워질 수도 없을뿐더러, 가까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힘들다.
그렇다면 20대인 나는 왜 논어를 읽었는가? 스무 살에 철학과에 진학했고, 당시에 많은 고전을 읽어냈다. 그때 읽은 논어는 굉장히 신기했다. 뭔가 철학책 같으면서도 격언을 담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삶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철학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대부분의 철학책이 삶과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이후 대학원에서 정약용을 전공하고, 고전 번역원 연수 과정을 들으며 논어를 더욱 자주 보게 됐다. 공부와 별개로 논어를 읽을수록 2,000년 전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의가 있는 구절을 많이 발견했다.
논어서설(論語序說)에서 정이천(程伊川)은 논어를 읽고 난 사람의 반응은 4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다 읽고 아무런 일이 없는 경우, 두 번째는 한두 문장을 터득하고 좋아하는 사람, 세 번째는 좋아하는 사람, 네 번째는 너무 즐거워 춤을 추는 사람이다(程子曰, 讀論語, 有讀了全然無事者, 有讀了後, 其中得一兩句喜者, 有讀了後, 知好之者, 有讀了後, 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필자는 여기서 한두 문장을 터득하고 좋아하는 정도인 사람인 것이다.
내가 논어를 전문적으로 전공한 사람도 아니며, 아직 공부 중인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게 도리어 ‘논어를 오해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20대나 30대 중에 논어를 읽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책에 손이 안 갔던 사람, 논어라는 책의 이름을 알고 있지만, 무슨 책인지 궁금했던 사람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논어의 각 장에 나오는 나에게 좋았던 문장을 설명하며 논어라는 책이 그렇게 어려운 책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우리 삶에도 충분히 의의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번역은 성백효 선생님의 번역을 참고하여 원문을 올릴 것이다. 이후 나의 생각을 적는 방식으로 글을 진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