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것, 그리고
學而 (1) 배움, 그리고 인정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 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하지 않는다면 君子가 아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논어를 읽지 않은 사람도 한 번은 이 구절을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구절을 보면 아마도 대다수는 “배우고 익히면 기쁘다고?”라고 생각할 것이다. 20대와 30대는 한참 배워야 할 나이라고 하지만, 정말 배우기 싫은 나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누구나 한 번은 수업이 듣기 싫다고 생각했을 거고, 어떤 때는 ‘이걸 내가 왜 공부하고 있나.’라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에 취업을 위해서, 혹은 자기 계발 등 나에게 필요한 공부를 하고 그것을 익히는 과정에서도 기쁨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기쁨을 느끼는 경우는 공부하는 과정이 아니라, 공부를 통해서 얻는 결과에 있는 경우가 많다.
공자가 말한 배운다는 말은 지금의 우리가 사용하는 배운다는 말과 다르다. 논어집주(論語集註)를 보면 주희는 여기서 배운다는 말을 본받는다는 뜻이라고 말한다(學之爲言, 效也). 그는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지만, 그것을 먼저 알고 나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나중에 아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아는 사람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즉, 우리가 생각하는 ‘앉아서 어떤 정보를 외우는 것’과는 다른 일이다.
주희가 말한 ‘본받는다’라는 말에는 ‘사람의 본성이 모두 선하다’라는 전제가 깔린다. 현대 사회에서는 선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불가능하다.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일종의 ‘선’ 혹은 ‘정의로움’에 관한 열망을 가진다. 좀 더 나은 사회를 바란다거나, 전쟁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것 따위가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은 종류의 배움에 관하여 안다.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혹은 펼쳤던) 사람을 롤-모델로 삼고, 그 사람의 인생 가치관을 본받는 다거나 그들처럼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힘들고 지쳐서 롤-모델처럼 살기를 포기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선하지 않게 살아도 우리는 살면서 여러 종류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사람과 한 걸음 가까워지면서 느끼는 기쁨은 다른 종류의 기쁨이다. 우리가 원하면 그때마다 느낄 수 있는 기쁨과 내 삶 한순간, 한순간을 들여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다르다. 이를 또 느끼기 위해 다시 열심히 살고, 또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열심히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본받고자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선한 영향력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러므로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쁜 것이다.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라는 말은 쉽게 공감할만한 말이다. 먼 곳에서 벗이 온다는데 누가 기뻐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우리가 기쁜 이유는, 친구가 먼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올 정도로 나를 생각해줬기 때문이다. 정이천은 “善으로써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程子曰,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보러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다. 멀리 있음에도 내가 생각나서 나를 찾아와주는 좋은 사람을 친구로 뒀다는 사실에, 그리고 나 또한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SNS만 봐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내 사진, 혹은 영상을 올린 다음 누군가에게 ‘좋아요’를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의 숫자를 통해 우리는 좀 더 많은 사람의 공감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데, SNS ‘좋아요’ 숫자가 낮거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서운함을 느낀다.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으면, 그 시간과 노력이 아무런 가치가 없어지는 것 같고 내 삶마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주희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에게 미쳐서 즐거운 것은 순하여서 쉽고,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역이어서 어렵다(及人而樂者, 順而易, 不知而不慍者, 逆而難).” 주희 또한, 우리가 남에게 인정받아서 즐거운 것은 쉽고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고 봤다. 그러므로 서운해하지 않는 사람을 일러 君子(成德之名)라고 말했다. 서운해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사람이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기만 해도 우리는 서운함을 느낀다. 하물며, 내가 노력한 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내가 봤을 때, 논어의 첫 문장에 이 구절이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응당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 느낌은 남이 아닌 나에게 있다는 것을 마주해야 한다. 즉, 남이 나를 서운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운한 상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나와 똑같은 존재가 아니기에, 하는 생각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르다. 그러니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필자도 글은 이렇게 쓰지만, 서운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생각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천천히 노력 중이다.
논어의 첫 구절은 곱씹을 때마다 다른 의미로 나에게 다가온다. 20대의 나는 첫 구절을 읽으면서 많이 반성했다. 이제는 삶에 지향점을 정하고 나아가야 할 시기인데, 내가 정한 지향점이 아닌 남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싶다. 나에게 주어진 삶은 나의 삶이므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좋은 방향(내가 하기 싫은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 恕)으로 나아간다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