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애 빠진 로맨스>의 한 장면입니다.
할머니에게 문병을 간 손녀, 할머니 앞에서 자신이 하는 팟캐스트를 열심히 설명합니다. 할머니 토그를 다룰 거라며 첫 주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
그러자 할머니가 손녀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자기인 사람이 어디 있어? 너는 그려?"
손녀가 되묻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면 뭔데?"
그러자 할머니는
"따가리, 조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노래하며 자신감을 갖자는 다짐을 합니다.
"네 인생은 주인공은 바로 너야" 엄지 척을 하며 용기를 불어넣는 조언을 합니다.
근데 따가리? 조연? 이게 뭔 말인가 싶습니다.
화려하게 핀 꽃들을 보러 가지, 잡초를 보려고 누가 일부러 시간을 내겠습니까?
크고 높은 것만 쫓아가지, 작고 낮은 것에 누가 굳이 관심을 두겠어요?
갖고 싶은 것만 열망하지, 비우고 내려놓는다는 걸 누가 생각이나 할까요?
좋은 거 하나라도 더 갖고 싶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걸 누리고 싶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멋진 사랑도 하고 싶습니다. 하다못해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걸 가지려고 애씁니다. 세상의 주인공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적어도 내 인생만큼은 주인공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이 글귀를 가슴에 새기면서요.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훨씬 많은 법, 사람에 치이고 사랑에 상처받은 손녀가 숙취에 시달립니다. 할머니가 왜 그러느냐 핀잔을 주자 손녀는 '내가 따가리, 조연이라 그런다'라면서 짜증을 냅니다. 그러면서 난 언제 주인공이 되냐며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운 할머니는 애정 어린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공도 해보고, 엑스트라도 해보고 조연도 해보고 그래야 인생이 재밌지"라고요.
내가 원하는 대로, 주도하는 대로 인생은 흐르지 않습니다. 내 마음같이 되지 않을 때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을 맛보지만 오히려 그게 인생을 스릴 있게 만들고 반전의 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도 버릴 수 없고, 뜻대로 되지 않아도 감내하는 게 인생, 그러다 좋은 일이 생긴다는 사실, 이미 숱하게 겪었을 테니까요.
세상은 주인공 한 사람만의 힘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엑스트라와 따가리가 있어야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듯이 인생도 나 홀로 주인공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아이를 받치는 부모의 역할, 힘든 이를 위로하는 친구의 역할, 말없이 묵묵히 응원하는 지인의 역할 등등 인생에서 주연으로 사는 것보다 조연으로 살 때가 훨씬 많습니다. 무럭무럭 별 탈 없이 자라는 아이, 힘을 얻고 용기를 내는 친구. 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조연을 한 보람이 있는 거겠죠.
처음부터 승승장구하다 어느 순간 존재감 없이 사라지는 주인공보다 탄탄한 기초를 쌓아 이룬 확실한 신스틸러가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언제까지 조연만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조연을 하다 보면 주연도 하고, 그러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많은 단역도 합니다. 가끔은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때도 있습니다. 삶에서 우리가 맡는 역할도 그렇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이었다가 내 가족 인생에 조연이 되고 누군가의 인생에는 단역일 때도 있듯이 말입니다.
화려한 꽃, 높게 솟은 건물, 삐까번쩍한 물건들이 전부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바탕을 이루는 건 꽃보다 이름 없는 풀이고 자잘하고 낮은 건물들이고 낡고 바랜 것들입니다.
그래서 꽃이 돋보이고 높은 게 더 높이 아찔해 보이고 새것이 더 반짝반짝 빛나 보입니다. 사실은 꼼수나 잔머리 없이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돌리는 에너지원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돌리다 보니 올해도 어느새 12월, 마지막 달입니다.
'인생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건 안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덜 익히면 풋내가 나고 많이 익히면 군내가 나는 법, 징징대지 말고 담담하게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가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고, 손대기만 하면 술술 풀리기만 하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만 하면 그게 인생이겠습니까? 영화 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따가리를 하면서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봅니다. 엑스트라를 하면서 받쳐 주는 역할도 배웁니다. 조연을 하면서 주연을 꿈꿉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려면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딛고 올라서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층 성장한 자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어떤 역할로 살아볼까요? 조연이든 엑스트라든 상관없습니다. 설령 따가리일지라도 괜찮습니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고,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문이 열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