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언제 만났느냐에 따라, 타인의 기억 속 나는 모두 다른 모습이다.
학창 시절의 친구들에게 나는 단발머리를 하고 교복을 입은 학생일 테고, 사회 초년생 시절에 만난 사람들은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첫 출근을 하던 신입사원의 모습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일에 익숙해지고 삶의 단단함이 조금씩 쌓인 후에 만난 이들에게는 사회의 맛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으로 기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신기한 건, 그 시절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면 꼭 나도 그때의 나로 돌아가는 것만 같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아주 어릴 적 친구와의 통화는, 오랜 시간 속 깊숙이 묻어 두었던 솔직한 마음들을 이끌어내곤 한다. 그렇게 통화를 하고 있으면, 지금의 우리 나이가 아니라 꼭 그때의 어린 소녀들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물론 거울 속 우리의 얼굴에서 주름을 지울 수는 없지만, 마음만큼은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
“운동은 계속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귀찮은 걸까?”
“그러게. 근데 우리 나이쯤 되면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래.”
“벌써 우리가 중년이라니. 너랑 얘기하고 있으면 괜히 옛날 생각도 나고, 꼭 옛날의 우리들 같고.ㅎㅎ”
“와 언젠가 우리도 할머니가 되겠지?! 기분이 참 이상하다 너랑 나랑 언젠가 할머니들이 돼있을 모습을 상상하니까.”
지금까지 함께 보낸 시간만큼을 앞으로 또 보내면, 우린 진짜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상했다. 지난 시간들이 참 길었다 싶다가도,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우리가 다시 대화를 나눌 때도, 마음만큼은 여전히 소녀이지 않을까.
이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가장 솔직한 나 자신을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어릴 적부터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주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런 친구가 있다는 건, 마치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열쇠를 꺼내는 일 같다. 어른이 되어 쌓여가는 나이테만큼 겹겹이 점점 어딘가로 잊혀지고 있는 듯한 그 시절 나를 그 친구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꺼내 놓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들이 있고, 어색한 침묵조차도 편안한 공기가 되어준다. 세상이 요구하는 역할과 기대에 맞춰 살아가느라 지친 날들 속에서도, 그 친구와의 대화는 나를 나로 되돌리는 작은 쉼표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멀리서 응원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문득 생각나 전화를 걸면 마치 어제도 이야기한 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대화가 있다. 그 시간들이 쌓여 우리의 우정은 더 단단해지고, 또 더 따뜻해졌다.
가끔은 생각한다. 언젠가 정말로 할머니가 된 우리도 여전히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목소리는 조금 더 느려지고, 기억은 더 자주 흐릿해질지도 모르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어릴 적 그때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계속해서 그때처럼 그리고 지금처럼 웃어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