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색(翡色)과 비색(秘色) 그리고 파티나(Patina)
천하제일 고려비색 (天下第一 高麗翡色)
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바로 고려청자만이 담고 있는 우아한 색감에 송나라 사신이 감동을 받아 남긴 찬사입니다. 과거 민예품 중 예술성이 가장 드높았던 고려청자. 비색(翡色)을 보는 것은 청자, 그 자체를 감상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색이 지닌 찬연한 신비로움은 청자에 닿은 빛이 유약에 스며들었다가 통과하며 탄생됩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유약 성분과 배합률 등 정확한 제조 정보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색은 재현해 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기에 그 의의가 남다른데요.
‘비색’이란 어떤 색을 뜻하는 걸까요.
우리나라의 비색은 ‘비취옥 비(翡)’자로 이루어져 있어요. 단어 그대로 비취옥 색을 뜻합니다. 실제로 당시 옥은 지금의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고급 보석으로 취급했어요. 따라서 자연스럽게 고귀한 옥 색에 다가가려 한 것이 시초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중국에선 고려청자의 비색을 ‘우후청천(雨後靑天)’ 즉, 비 온 뒤 갠 하늘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했답니다.
그렇다면 비색은 ‘옥 색’ 또는 ‘회색빛이 도는 푸른색’ 정도로 정의 내리면 되는 걸까요?
<무등도요> 조장현 도예가는 청자의 비색을 한 가지 색으로 정의하려 든다면 그 순간 죽어버려서 더 이상 비색이 아니게 된다고 말합니다.
빛에 의해 일렁이며 변화하는 스펙트럼, 그 넓은 색채의 범위를 비색으로 봐야 해요.
- 기품의 발견:ECER1
‘이런 의미에서는 ‘숨길 비(秘)’ 자를 써 신비로움, 비밀스러움을 간직한 색으로 풀이되는 중국의 비색(秘色) 개념이 더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그의 말을 손끝으로 따라 읽으며 청자를 향유하는 새로운 관점에 감명합니다.
이런 비색의 특성은 빈티지 가구에서 주요한 미의 가치 기준이 되는 요소인 ‘파티나(Patina)’와 매우 흡사합니다. 파티나란 본래 동 제품이 시간이 지날수록 산화되어 청록색으로 변한 표면을 일컫는 용어예요. 오늘날에는 그 개념이 확장되어 오래된 목재나 가죽, 물건의 표면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고혹한 태와 색을 의미합니다.
고려청자가 비색을 담음으로써 높은 평가를 받듯, 시간의 중첩으로 그윽한 멋이 물든 파티나가 돋보이는 빈티지 가구는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이는 단순히 연갈색의 목재가 농갈색을 띠게 됐다거나, 가죽의 색이 짙어졌다는 ‘색’의 변화로만 치부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의 색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비색의 매력처럼 말이죠.
재료의 특성에 따라 가구마다 다르게 입혀지는 파티나는 목재라면 수종이나 머물던 공간의 습도, 온도, 또는 물성과의 마찰에 따라 각기 다른 고색(古色)을 지니게 된답니다. 또한, 비색을 보는 것이 고려청자를 감상하는 방법이기도 하듯, 파티나를 보는 것이 가구 그 자체를 감상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요.
이렇듯 비색과 파티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미에 대한 칭송이 이어져오는 예술품에는 우리가 쉬이 측정할 수 없는 고유한 가치가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가치를 찾아내고, 관찰하고, 향유하며 이 과정을 통해 예술을 즐기기도 합니다.
색, 그 너머의 것을 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심미안과 감식안의 힘을 가져다줄 비색과 파티나.
한 가지 색으로만 치부할 수 없으며, 모방될 수 없기에 작품의 희소성을 높여주는 이 요소들은 예술을 감각하는 면에서 교차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