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이효석의 <산>을 읽고
여전히 현실 도피처인 산, 그 경계 없는 평온함
현대에도 여전히 자연과 산은 현실 도피처이고 현실과는 대조되는 긍정적인 평화로운 공간이다. 예전 고전시가 작품 속에서 속세를 홍진이라 칭하며 자연을 지향하던 시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연은 늘 그렇듯이 속세와 대조되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문명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힐링’, ‘휴식’이란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초록빛, 산, 숲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예전에 학교에서 다양한 자연 친화 작품을 봤을 때 시 속 화자, 혹은 소설 속 인물의 자연 지향 의식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고전 작품은 관용적인 표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속세의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그들의 흥취를 극대화하기 위해 안빈낙도를 하나의 도로 끌어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읽으며 항상 ‘정말 자연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자연 친화라는 주제를 말로만 그리는 것일거야’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또한 노후에는 고향인 강원도 깊은 산골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 하는 엄마,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 한 구석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마음이 있곤 하였다.
그런데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양한 상황에 처하면서 정말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다른 곳이 아닌 산과 숲이 떠올랐다. 이전에는 산과 숲은 지루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정말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을 떠나 산과 숲에서 큰 숨을 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노후에 깊은 산골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엄마, 아빠가 ‘우리도 이제는 편히 쉬고 싶어.’라고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전에는 산이 그저 초록빛, 경계 없는 지루함으로 느껴졌다면 이제는 왜 사람들이 산을 찾는지, 왜 그렇게 산을 그리는 작품이 시대와 양식을 넘어서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왜 중실은 왜 현대와 과거의 많은 사람들은 산을 그리워 할까? 일단 그건 현실에서의 불만족에서 오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는 심리적인 안식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작가는 ‘넓은 하늘 밑에서도 갈 곳이 없다. 제일 친한 곳이 늘 나무하러 가던 산이었다.’라는 부분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렇다면 현실과 산이 다른 점은 무엇일까? 현실은 어수선한 공간이다. 산에는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산이 주는 매력은 바로 경계 없는 평온함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수많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존재하고 그 경계를 나누는 과정에서 혹은 정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이 생기기도 한다. 그와 달리 산은 경계가 없기에 소유가 없기에 중실은 나뭇잎을 이불 삼아 잠에 들기도 하고 꿀과 노루를 먹으며 배부름을 느끼기도 한다. 중실이 애초에 현실을 떠나온 것도 현실의 수많은 경계 간의 다툼 속에 지쳤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지만 경계들 사이에서 중실은 상처를 입었다. 가장 큰 사건은 중실과 첩 사이를 의심한 김 영감이겠지만 단순히 그 하나의 사건 때문만이 아니라 중실은 현실 세계의 어수선함, 다툼, 경쟁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경계 없는 평온함 속에서 중실은 자연에 동화되어 간다. 별을 세어 가면서 중실은 제 몸이 별이 되어 감을 느낀다. 현실의 수많은 경계에 환멸을 느껴 자연 속에 들어와 경계 없는 평온함을 느끼다가 그 스스로 온전히 자연과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마무리가 인상적이다. 나도 언젠가 지금보다 더 현실의 삶에 염증을 느껴 산에 잠시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별을 하나씩 세어 가면서 자연에 동화되고 싶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별 셋 나 셋..’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