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장, 산텔모 시장 그리고 탱고의 향기, 라 보카
마지막 벨기에 와플을 못 먹고 와서 아쉬움으로만 가득했던 유럽을 뒤로한 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넘어왔다.
영국 런던을 떠나던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아쉬움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설렘과 흥분으로 뒤 바뀌어있었다.
탱고의 고장이자 나의 소중한 중남미 여행의 첫 시작점이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전 유럽여행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즐겼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면 아르헨티나부터는 그 시간을 넘어서 낯선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그 낯선 곳에서도 조금씩 내 세상을, 내 일상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 시간들이었다.
Buenos aires
‘좋은(Buenos) 공기(aires)’를 의미하는 이 단어를 왜 하필 이 도시에 붙였을까.
사실 정확한 유래는 모르겠지만 이 단어가 이 도시에 찰싹 잘 달라붙는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이 도시가 지닌 여러 다채로운 매력이 사람들의 마음속 좋은 공기를 불러들여 기분 좋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갈 곳도, 볼거리도, 즐길거리도, 먹거리도 참 많은, 유럽 전통과 라틴특유의 감성이 공존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다채로운 매력 속에서 난 또 그렇게 예견 없던 한달살이를 하며 한 달간의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흘러 보냈다.
아마도 이곳이 내 여행의 마지막 도시였다면 난 최소 세달살이는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주인과 따로 살아 프리한 보금처 그 자체였던 레콜레타 구역의 숙소부터 시작된 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추억은 이후 프리한 음악가 주인과 함께한 팔레르모 구역의 숙소, 귀요미 다정 커플 주인과 함께한 오벨리스코 주변 숙소로 이어졌고 마지막 다시 돌아온 팔레르모 구역의 숙소에서 아기자기 이쁘장한 파티오와 방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햇빛에 타들어갈 것 같은 뜨거운 정열의 라틴국가를 예상하고 걱정했건만 더위를 무진장 싫어하는 나에겐 다행인 건지 3월이라는 계절 탓에 우리나라 늦봄, 초가을과 같은 서늘한 날씨와 함께 부에노스에서의 평온한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소박한 축제의 장, 산텔모(San telmo) 시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후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산텔모 시장이었다. 때마침 주말에 도착했던 터라 산텔모 시장 주변에는 일요일마다 열리는 페리아 일요시장으로 나의 하루는 더 풍성해졌다.
과거 유럽 이민자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산텔모 시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이 담겨 있는 느낌이다.
시장 안을 들어서면 입구에는 아르헨티나식 만두인 엠파나다 맛집 앞에 줄지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또 안 먹어볼 수는 없기에 약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엠파나다를 손에 들고 시장 곳곳을 둘러본다. 시장 안은 야채, 과일, 치즈 등에서부터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먹거리로 가득 차 있다. 보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을 맘껏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끌시끌하고 복작거리는 이 시장 안에서 느껴지는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또다시 나를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복잡한 이 시장 안에서 길치인 나는 또다시 왔던 곳을 반복하며 길을 잃곤 한다. 하지만 그래도 마냥 좋다. 계속해서 즐거운 볼거리와 먹거리가 쏟아져 나오고 그렇게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면 어느 구석에서 들려오는 흥겨운 연주 소리를 만날 수 있으니깐.
시장 출구를 나오면 수많은 노점들이 가판을 깔고 뜨거운 햇살 아래 손님을 맞고 있다.
가판대 위에 있는 고서와 그림, 포스터 등 여러 오래된 미술품과 민예품, LP, 손 때 묻은 골동품, 고가구들이 그 오래된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오래되어 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들 덕분에 나는 시간을 잠시 멈추고 과거로 돌아간다.
그러다 쨍한 햇빛이 부담스러워질 때쯤 잠시 근처 스타벅스를 들려 숨을 고른다. ‘Dulce de latte'라는 아르헨티나 스타벅스 표 커피를 드링킹 하고 달달한 메디아루나를 한입 먹고 나면 다시 생기가 돈다. 그리고 또다시 문밖을 나서 과거 여행을 이어간다.
끝없이 펼쳐진 과거 여행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저 한쪽 편에서 아일랜드 이후 그리웠던 거리의 예술가들이 연주를 시작한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인형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앙증맞은 인형극이 나를 맞이하고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라틴느낌 물씬 풍기는 할아버지가 기타를 들고 연주하고 있다.
몇 걸음 더 가다 보면 기분 좋은 청년들이 기분 좋은 합동연주를 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익살스러운 퍼포먼스를 펼치는 거리의 예술가들까지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마무리되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 이후에도 여러 번 찾게 된 건 "언제 가도 좋았으니깐."
이곳은 단순한 먹거리 시장, 단순한 플리마켓이 아닌 나에겐 "소박한 축제의 장"으로 느껴졌기에 언제 가도 참 좋았다.
탱고의 화려함이 가득한 라 보카(La boca)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장 라틴스러운 곳을 꼽으라면 단연 라 보카를 꼽고 싶다.
열정의 탱고가 시작되게 된 ‘라 보카(la boca)’의 boca는 ‘입, 입구’를 의미하는 단어로 외곽의 라 플라타강 입구에 위치해있다는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곳곳에서 남미보다는 유럽의 향이 더 많이 느껴지는 이 도시에서 탱고의 진득한 향이 담긴 이곳을 만나자 진짜 남미에 온 기분이었다.
라 보카를 찾았던 그 날은 또 유독 그 어느 날보다 화창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햇빛은 더없이 쨍하게 내리쬐는 날이었다.
라 보카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자 내가 예전부터 그려왔던 라틴의 정열을 담은 햇빛이 내 몸 위로 비친다. 그 햇살을 느끼기도 잠시, 빨강, 초록, 파랑, 노랑 등등의 다채로운 색깔로 가득한 화려한 색채의 건물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난 또 그 다채로움을 배경으로 오랜만에 카메라 셔터를 조심스럽게 눌러본다.
현란한 색감의 건물들 때문인지, 쨍한 햇빛 때문인지, 내 옆을 오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괜스레 기분이 밝아지고 생기가 도는 느낌이다. 신난 기분이 사진에라도 담기듯 ‘에이미, 지금이야. 뒤돌아봐!’라는 친구의 말에 나름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컷이 나와 버렸다.
돈 없는 가난뱅이 장기 여행자라 길거리 쵸리판 하나 입에 물고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골목 곳곳에는 탱고의 고장답게 화려한 탱고를 표현한 그림들이 여기저기 잔뜩 늘어서 있다.
그리곤 그 그림들을 배경으로 또 어디선가 흥겨운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따라 걸어가다 보니 야외테이블로 가득한 길거리 카페와 레스토랑 곳곳에서 조금씩 보이는 화려한 몸짓이 내 발걸음을 재촉한다.
빨간 손수건을 들고 섬세하고도 화려한 몸짓을 하는 남녀의 모습에 색다른 멋스러움이 뿜어져 나온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불타오르듯 정열적이면서도 그루브 있는 그들의 몸짓이 가져다주는 열정과 흥겨움에 물들어간다. 이곳에서는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내 몸의 흥겨움만 느껴본다.
댄서들의 열정적인 공연이 끝이 나도 마치 탱고의 열정이 거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듯 그곳은 더 활력이 넘치는 느낌이다.
길목 끝까지 걸어가자 철길이 늘어서 있고 그곳에 또다시 쨍한 햇빛이 들어서자 주변의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 순간 그 아름다운 풍경이 살아있음이 너무 감사하여 카메라를 꺼내어 또 한 번 조심히 담으며 발길을 돌린다.
화려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을 때 이곳을 언젠간 또 한 번 방문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