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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mit Trucker Jan 23. 2020

트럭커는 영어를 어느 정도 해야 할까?

회화보다 읽기가 더 중요하다.

“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데요.” “기본 영어만 하는데 트럭일을 할 수 있을까요?” 종종 듣는 질문이다. 종일 혼자서 운전하고 대화 상대도 없는 직업이지만 영어로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미국이니 당연하다. 그럼 어느 정도로 해야 할까? 기준이 없다.      



첫 번째 장벽은 CDL 필기시험이다. 일반운전면허는 영어 이외의 언어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한국어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CDL은 오로지 영어로만 시험을 본다. CDL 취득 자격 조건의 하나가 영어 소통 능력이기 때문이다. 필기시험에 특화된 한국 영어교육 덕분에 내게 CDL 필기시험은 쉬웠다. 다른 사람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민자 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여기서 태어나서 유창하게 말하는데도 필기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봤다. 옐로캡 면허 시험도 그렇고 CDL 면허 시험도 그랬다. 한국인이 영어를 못한다지만 아니다. 우리는 필기시험에 정말 강하다. 사실 CDL 필기시험은 예상문제만 풀어도 통과할 수 있다. 그 정도 문장을 읽고 이해할 수 없다면 트럭 운전뿐 아니라 다른 직업도 구하기 힘들지 않을까.    

  

두 번째 장벽은 영어로 듣고 이해한 후 말하기다. 나를 포함해 많은 이민자가 절감하는 장벽이다. 미국에서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미국인이 자기네끼리 하는 얘기를 다 못 알아듣는다. 미국 드라마도 자막 없으면 안 들린다. 그래도 리쿠르터와 전화통화를 하고, 오리엔테이션에서 강사가 하는 말을 눈치 반으로나마 알아들었다면 트럭일은 가능하다.      


처음에 생소해서 그렇지 트럭 업무에서 사용하는 말은 한정돼있다. 뜻만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면 유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회사와는 직접 통화보다 문자 메시지로 업무 사항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영어 때문에 미리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실무에서는 회화보다 읽기 능력이 더 중요하다. 교통표지판, 거래처에서의 안내판, 구내 준수사항 등 읽기가 필요한 경우가 더 잦다. 한국인은 시험영어로 단련했기에 읽기에 강하다. 외국인 앞에서는 입도 못 떼지만, 뉴욕타임스는 척척 읽어내지 않는가. 미국인도 어렵다는 그 신문을 말이다. 

일단 트럭 운전을 시작만 하면 그렇게 영어 쓸 일이 많지 않다. 아니 아예 말할 기회가 적다. 트럭스탑에서 다른 동료 드라이버와 잡담을 주고받을 수도 있겠지. 그건 성격 문제다. 나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물론 내 경우는 조금 특별할 수도 있다. 나는 뉴욕시에서 5년간 옐로캡 운전을 했다. 그때 내 영어 듣기 능력이 많이 늘었다. 손님과 대화도 했고, 손님들끼리의 대화나 전화통화를 들으며 저절로 듣기 연습이 됐다. 손님이 불러주는 주소를 확인 차원에서 내가 똑같이 따라 되풀이했더니 발음 연습이 됐다. 아기가 엄마 말 따라 하며 배우듯 말이다. 처음엔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듣는 손님이 자주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뉴욕시에는 뉴요커와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와 여행객들이 저마다의 액센트로 얘기한다. 그래서 어지간한 액센트는 서로 알아들을 준비가 돼 있다.      


트럭운전을 하고 만나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지방 특유의 웅얼거리는 억양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 사람들도 내 억양이 익숙하지 않아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잦았다. 특히 내 L 발음을 못 알아듣는 경우가 잦았다. 체크인할 때 “내 이름은 길, 스펠링은 KIL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KIN으로 적었다. L 발음이 어렵구나. R만 어려운 줄 알았더니 실제는 L이 더 어렵네. 요즘에는 목에 걸고 다니는 회사 신분증을 같이 보여준다. 이름 보고 적으라고.      


내 트레이너였던 Nathan과도 처음 며칠이 지난 후에는 별 불편 없이 소통했다. 그도 내 발음에 적응한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은 어법에 맞는 문장, 발음은 맨 나중이다. 발음만 유창하면 내가 영어를 잘하는 줄 오해할 수도 있다.      


이렇게 얘기했어도 사실은 Nathan과 한국말처럼 미묘한 뉘앙스까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통했다면 후진을 훨씬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배웠을 것이다. 후진은 감이다. 감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국말처럼 형용사가 발달한 언어로 배웠다면 좀 더 이해가 쉽지 않았을까 싶다.     


북미 장거리 트럭커 카톡방 구성원에게서 들은 얘기다. 영어 문제로 한인이 하는 회사에 취직해 트럭 운전을 배운다는 사람이 종종 있단다. 한인끼리 서로 이끌어주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그 보수가 말도 안 되게 낮았다. 어려운 상황을 이용한 노동착취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네가 여기 아니면 어디서 트럭운전 경력을 쌓겠느냐 하는 심보 같다. 영어에 얼마나 자신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기본회화가 가능한 정도라면 용기 내 제대로 된 회사의 문을 두드려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우리보다 영어 못하는 이민자 출신 트럭 기사도 많다.      


트럭커 영어회화책이라도 써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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