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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Jun 26. 2023

비판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매월당 김시습의 『임천가화』에 나타난 비판의 말로(末路)

                   성주께선 오백년 만에 중흥하신 임금이시라

                   백성들 태평을 즐겨 그 업적 아주 뛰어나네

                     온갖 정사 잘 처리한 뒤 불교를 숭상하니

                      백관들이 비로소 태평성대를 축하하네

                      부처께서 안목 있어 눈길을 돌리시면

                  우리 대왕 만세를 누리라고 축수(祝壽)하시리     


              - 매월당 김시습,‘망경운백관치하’(望卿雲百官致賀) -



 위 시는, 1453년 세조(수양대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어린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3일간 통곡을 하고 가지고 있던 책을 모두 태운 뒤 승려가 되어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작품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기에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보지만, 역사적으로 우리가 배워왔던 사실과는 정반대로 세조를 찬양하고 있어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에 대하여 『임천가화』를 발견 및 번역하고 세상에 발표한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차충환 교수는 “당대 제왕과 신하의 절대적 관계를 고려해보면 그가 자신의 속마음과 관계없이 겉으로는 세조를 칭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급히 수습하였다. 하지만 당시 세조에 대하여 그러한 마음을 가진 신하들이 한둘이 아니었을텐데, 그렇다면 그들도 모두 생육신인가? 이러한 논리라면 조정에 있던 사람들의 절반은 ‘나도 생육신이다’라고 손들며 앞으로 나올 수 있다.     


 이번에 살펴볼 매월당의 수필 『임천가화(林泉佳話)』는 2019년도에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서 처음 발견되어 세상에 그 내용이 소개된 지 얼마 안되는, 고학번이지만 첫 인사를 하는 ‘복학생’ 같은 수필이랄까. 『임천가화』는, ‘김시습이 승려가 되어 일생을 유랑하였던 삶을 바탕으로 쓴 불교 비평 수필집’이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내각문고에 소장된 매월당집 별집의 표지. 조선 초기 불교의 타락한 모습을 비판한 저술     ‘임천가화’(林泉佳話)가 담겼다. 



       어떤 중은 법회에 참여하면서 때가 많아 냄새를 풍기고 땀에 젖어 이와

    서캐가 옷깃에 버글거린다염불하는 것도 같이 하거나 혼자 하거나 마음대

     로 하며불전과 법당에 오를 때에도 대충 대충하여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

    스스로 고승이라고 하며 다른 승려들을 공경하지 않고 거만하게 성인의 얼굴

    을 한다심한 자는 가는 비단으로 납의를 짓고서 안에는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어 화려함을 다투어 과시한다.   


       

 김시습은 고승(高僧)의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불교 전반에 해박한 승려였다. (매월당은 분명 자유분방한 선객(禪客)이었지만, 고려의 국존(國尊)이었던 보각국사 일연(一然)과 같은 전통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사상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불교 연구자였던 그는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 와 같은 심오한 연찬(硏鑽)에 의한 주석서뿐만 아니라 『임천가화』와 같은, 실생활의 모습도 함께 언급한 비평집을 편찬하였는데, 『임천가화』에서는 불교의 본질과 이치, 불교 제도와 풍습, 승려의 거취와 고승에 관한 이야기,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법회를 여는 자는 혹 죽은 자를 천도한다는 이유로혹 편안함을 보중한다

       는 이유로 헛되이 법석을 열고 망령되이 불사를 한다승려들은 또한 보시의

       이익에 끌려서동쪽을 치달리고 서쪽을 놀라게 하여 세력에 의존하여 나아

       가기를 청한다법회를 행함에 이르러서는 걸신들린 듯이 턱밑으로 침을 질

      질 흘리고 탐욕스러운 눈빛을 번쩍이며입으로만 떠들어대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마음이 다른 데 연고가 있으니보시하는 자 또한 그들을 공경하지

       않는다          



 엄격한 청교도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던 미국의 칭송받는 소설가 ‘나다네일 호손(1804~1864)’은 『주홍글자』를 통해 당시의 청교도주의와 그 위선을 비판했고, 조선 후기의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자신도 청나라 유학파 지식인, 양반이었으면서도 『열하일기』를 통해 부조리한 양반세계를 고발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불교에 귀의한 승려 매월당은 타락한 불교계와 승려를 비판한다. 김시습은 승려임에도 불교의 윤회사상을 핵심의 자리에 앉히는 것을 거부하였고, 진리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임천가화』에서도 말하고 있다. 매월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집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비롯한 그의 작품세계에서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까지 모두 통합하는 시도를 하곤 하였는데, 특히 『금오신화』 의 다섯편의 이야기 중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에서는 유교의 경직성에 도전하는 요소들을 충만히 펼쳐놓아 성리학자들의 공분을 사기도 하였다.

(‘이생규장전’은 자유연애, 죽은 자와의 사랑, 적극적이고 대장부형의 여성상 등 유교사회에서 배척하는 가치관만을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였다)


 예전의 글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성리학의 대가로 알려진 이황(李滉)으로부터 ‘색은행괴(索隱行怪)’하는 이인(異人)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퇴계 이황의 위 의미는 사실상 속된 말로, 3음절의 단어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저 사람, 완전   ⃝⃝ ⃝ 아냐?” 라고 말이다)  율곡 이이(李珥)의 "율곡선생전서"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김시습의 외모는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이미 부정적인 관점에 의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당시의 대세였던 성리학자들에게 배척당하고, 불교계에 있어서도 마냥 환영받을 수 없었던 ‘불편한 존재’였던 김시습은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 ‘외로운 검객’으로 힘겹게 삶을 살아갔다. 김시습은 미국의 작가 ‘애드거 앨런 포(1809~1849)’와 유사한 점이 많다. 천석고황(泉石膏肓)의 성정이 매월당이 본질이라면, 포는 어둡고 음울한 심리에 초점을 맞춘 인간 본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불우하고 쓸쓸한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에서는 ‘심리학’이라 명명하는 동양에서의 ‘마음의 다스림’, 이 양자는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심리적인 현상을 관찰·분석하여 주로 문제와 장애에 대한 파악과 치료에 관심을 갖는 반면에, 후자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문제마저 이해하고 포용하는 가치를 미덕으로 삼고 있다. 포는 인간의 태생적인 ‘악함’과 마음의 병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에 멈추었지만, 매월당은 아픈 마음을 위로하는 것에서 나아가 마음을 통제하는 주도적인 역할에까지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견 이 둘은 마음에 대한 방향이 다른 것 같지만, 엄격한 아버지와 따뜻하고 인자한 어머니와 같은 전통 가부장적인 부모로, 결국 한 가족인 셈이다.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된 매월당집 중 별집 ‘임천가화’의 첫장.  필치(筆致)가 예리하게 보임은 나만의 느낌일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임천가화』라는 제목의 뜻은 ‘자연 속에 살면서 마음으로 생각을 기록한 글’이라고 한다. 한자의 해석만으로는 ‘임천(林泉)’이란, 수풀과 샘이라는 의미로 ‘은사가 사는 곳’을 의미한다. 그리고 ‘가화(佳話)’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아름답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동안 『임천가화』는 조선 중기의 김휴(1597∼1638)가 1637년 남긴 도서해제목록집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 등을 통해 제목 정도만 전해 왔다. 하지만 이번의 발견으로 인해 기존 김시습의 사상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의 새로운 면모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것이 큰 의미라고 하겠다. ‘신역연경’(新譯蓮經)이라는 시 뒷부분에는 “우리 전하처럼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이 역대의 제왕보다 초월하면서…”라며 수양대군인 세조를 극찬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마 현실적인 생활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비진의표시’를 한 것으로 추정되나


 “표의자가 의사표시의 내용을 진정으로 마음 속에서 바라지는 아니하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여 그 의사표시를 하였을 경우에는 이를 내심의 효과의사가 결여된 진의 아닌 의사표시라고 할 수 없다.”


- 대법원 2001. 1. 19, 2000다51919 51926 판결 - 


라는 판례의 취지와 같이 김시습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는 부분적이나마 이제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지하(地下)에서 당황해 하고있을 매월당의 항변이, 이러한 융통성이 없었던 사육신과 젊은 목숨을 바친 독립투사들의 단말마의 외침과 뒤섞여 들리지 않는다. 역시나 기록에 의하면, 김시습은 1463년과 1465년 법화경 언해, 원각사낙성회 등 세조의 불교 관련 사업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김시습 연구에 대한 권위자이자 고전문학자인 경희대 차충헌 교수. 고전문학은 '한자'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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