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컨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인생
소문난 유신론자였지만 정작 그가 신을 사랑하였는지, 신과 친밀하였는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방법론으로는 알 길이 없다. 그는 영국의 대법관을 지낸 법률가이자,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는데 공식적인 경력은 법률가로서 60세까지는 왕실과 보조를 맞추며 승승장구 했다. 하지만 대법관 재임 당시 뇌물수수 혐의로 수일간 런던탑에 수감되었고, 이것으로 그의 공직생활은 막을 내리게 된다. 5년 후 그는 눈(雪)이 부패를 방지해줄 수 있다는 원리를 실험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닭을 사서 속을 비우고는 그 안에 눈을 채워넣다가 폐렴에 걸려 며칠만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는 바로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명언으로 잘 알려진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다.
https://youtu.be/Fkg72jZ8mqU?si=LgNPvSo9rHPLk74P
베이컨은 『학문의 진보』에서 위 호라티우스의 <서한>을 인용하며 그 의중이 의심스러운 여러 질문을 하는 사람을 피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인들의 나에 대한 모든 질문이 호의로 하는 것은 아닐 진대, 질문들 가운데는 약점을 잡으려 하거나 말실수를 유도하려는 의도가 흠뻑 배어나오는 것들이 적지 않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하여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악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번에 살펴볼 『학문의 진보』는 '영어로 쓰여진 최초의 철학서'라 일컬어지는, 베이컨이 1605년에 출판한 저서이다. 당시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에게 헌정하는 형식을 취하였고, ‘신과 인간 그 학문의 발달과 진보’라는 세부 제목의 1,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더불어 『베이컨 에세이』라 하여 진리와 죽음, 복수, 역경, 질투, 연애 등과 같이 관념적 개념으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성질, 습관과 교육, 청년과 노년, 예의와 몸가짐, 사법 등 우리의 생활 및 사회 제도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철학을 풀어놓는 글도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는 위 『학문의 진보』 도입부에서 베이컨이 칭송하는 폐하, 즉 제임스 1세에 대해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임스 1세(James I & VI, 1566~1625)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투잡을 하였던 왕이었는데, 스코틀랜드 국왕(제임스 6세)을 하면서 뒤에 추가적으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국왕(제임스 1세)이 되었다.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으로,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으로 칭했다. 제임스 1세에 대해서는 여러 업적과 평가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그의 지시로 번역한 ‘킹 제임스 성경’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여왕인 엘리자베스 1세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야망을 쉽게 이룰 수 없었던 베이컨은 여왕의 사후, 왕위가 스튜어트가의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에게 넘어가자(영국의 제임스 1세) 비로소 물 만난 고기 마냥 뜻을 이룰 수 있었는데, 제임스 1세의 호의를 힘입어 법무장관이 되었고, 후에는 대법관(총리를 겸하였다)이 되었다.
베이컨은 위 『학문의 진보』에서 학식이 높은 국왕 아래에서 행복한 치세가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진실된 깨달음의 발로(發露)인지 어용(御用) 지식인의 일면인지는 각자 판단의 몫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베이컨은 제임스 1세의 장점에 집중하여 이를 부각하였다는 점과 제임스 1세는 실제로도 학식이 뛰어난 국왕이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학자라기보다는 법률을 기반으로 공직에 몸을 담은 정치인이었던 베이컨은 이제 그의 에세이에서 본업인 법률가로서의 풍모를 전문성과 연륜을 바탕으로 정약용의 『목민심서』 스타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선배 법률가, 즉 대법관으로서 후배 재판관에게 사법(司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경험으로 전하는 부분은 왜 그가 ‘고전경험론의 창시자’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는 중세 스토아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경험과 이성을 결합하여 과학적 사실을 점진적으로 구축해나가야 한다는 귀납적 방법론을 주창하였다. 그의 귀납적 방법론은 모든 사실과 증거를 수집하여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까지 결코 예단을 하지 않는 법관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경험과 이성의 결합은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관찰과 실험으로 현출될 수 있었고, 그의 마지막 순간도 이러한 실험을 하다가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비단 『학문의 진보』나 에세이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베이컨의 글에는 성경구절을 인용한 부분이 매우 많다. 영국의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그가 신을 진정 사랑하였는지는 그의 귀납적 방법론을 활용해 보자면, ‘그렇다’라는 대답을 필자는 하고 싶다. 하지만 언제나 그가 인용하였던 ‘신’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효과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도구였을 뿐 정작 신을 위한 삶은 아니었다. 인간의 지성으로 학문의 진보를 꾀했던 이 법률가는 인간이 유한하고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간은 탁월한 지성과 심오한 영성의 수준과는 다소 동떨어지는 육신을 가지고 있으며, 이 점은 지성과 영성의 자랑스러움보다 더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베이컨은 이 부분에 대해 물론 인식은 하였겠지만 그 한계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지 못한 채, 정치적 야망과 육신의 정욕, 그리고 연약함에 마지막 실험의 닭과 함께 눈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