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줄었다.
졸려도 잠을 미루고, 피곤해도 일찍 일어나는 하루를 반복하며 보낸다.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글을 쓰지 않아도 감정이 복잡하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다. 집 밖이며 안이며 할 거 없이 뜨거웠던 여름 끝 무렵부터 천천히 식어가는 최근까지 약 두 달 정도 이런 생활을 지속했다. 잠을 줄이고 생활시간을 늘리는 것은 수명을 당겨 쓰는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조금 더 자려고 노력해 봤지만 6시간 이상 자는 것이 버겁다. 건강에 이상이 없다면 이대로 유지해보기로 한다.
꾸준히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것 말고는 하루를 유지하는 패턴이나 의식 같은 것들을 없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운동과 읽기를 하는 것, 생산적인 활동을 하나 이상 하는 것 등을 하루의 버팀목으로 세웠다면 이제는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어제나 내일이 아닌, 오늘을 보내는 것으로 버팀목의 역할을 대신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대신, 오늘의 열심 쪽으로 초점을 이동한 것이다. 스물아홉의 요즘이 유난히 좋은 이유다. 물론 고장 난 카메라처럼 갈피를 못 잡고 이동하는 포커스 때문에 징-지잉-징-지잉 소리를 내는 괴로운 날이 있기도 하다. 그래도 사지를 펼쳐 서른이라는 바위를 막아보려 했던 내가, 손가락 하나로 '지금'이라는 순간으로 초점을 이동하고 있으니 괴로움은 훨씬 덜 하다. 당신 덕분이다.
당신이 유난히 좋다. 당신이 있는 오늘에 집중하느라 일도 쉼도 수월하다. 과거는 당신을 알아보게 한 밑거름이 되었으니 더 이상 후회할 일이 없고, 미래는 당신과 함께함으로 꿈꾸니 두려울 틈이 없다. 그땐 다 그렇다며 나를 얕잡아 봐도 좋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일로도 틀어지는 것이 인간관계인데 너도 예외는 아니라며 주의를 줘도 좋다. 네 계절은 겪어야 한다고 훈수를 둘 때면 나는 얼른 당신의 주머니에 숨겨둘 호빵에 손을 데이고 싶은 심경이다.
끝을 상상하지 않거나, 이별이란 단어를 제명함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끝을 상상하며 지금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 이별의 감각을 잊지 않으며 서로를 감사하는 것.' 그렇게 정한 우리는 천천히 오른쪽 검지를 들어 반셔터를 눌렀다. 각자가 집중하던 고집스러운 초점을 가뿐히 한 곳으로 맞추며 스물아홉 혹은 그 이상 된 오래된 카메라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