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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무 Jun 02. 2021

열여섯의 기분은 어때

미안해 널 미워해 이해해 넌 그렇게 그대로인걸

문득 너를 떠올린 지가 되게 오랜만이라는 걸 깨달았어. 네가 떠나고 나서 1년 정도는 너를 떠올리지 않는 날이 없었어. 고개를 숙이면 어딘가 고여있는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늘 고개를 치켜세웠어. 근데 그러면 시야에 하늘이 들어왔고, 저 너머 어딘가에 네가 도착해 있으려나 그런 생각에 또다시 고개를 떨구게 되더라. 그럼 고개를 숙이지도 말고, 치켜들지도 말면 되는 거 아닌가 싶겠지. 그런데 고개를 똑바로 들고 걷자니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이 시야에 들어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너라는 사람이 한순간에 갑자기 사라졌지. 다른 사람들은 잘도 곧게 걷더라고. 내 발 밑은 이렇게 흔들렸는데.


새까만 차림을 하고 나타난 선생님이 네 책상 위에 하얀 국화꽃을 내려두자마자, 우린 그제야 울 수 있었어. 네가 정말 죽었는지 아닌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운다는 건 정말 네가 죽어버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니까. 네가 죽지 않았는데 그런 무례를 범할 순 없었어. 책상 위 덩그러니 놓인 하얀 꽃은 이제 이 책상 주인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 분명하게 알려주는 상징 같았어.


우리 사실은 되게 친했잖아. 초등학교 5학년 땐가, 6학년 땐가. 기억 나? 같이 친하던 여자애들이랑 운동장 스탠드에서 다 같이 엉엉 울었던 거. 네가 "그냥 친구끼리 잘 지내면 안 되냐고"하면서 먼저 울던 게 기억 나. 울음은 왜 이렇게 전염성이 강한지 모두 순서대로 울고, 머쓱하게 얼굴 닦고 손잡고 집에 갔던 거 생각나네. 그리고 우린 가고 싶은 중학교 순위를 똑같이 써서 지망 원서를 냈잖아. 같은 중학교에서 2학년이 돼서야 너랑 같은 반이 되어 신났어. 그때 너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지만.


참, 이런 기억은 오래도록 남지? 선명하게도 말야.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안 된 때였어. 다음 수업이 과학실에서 하는 거라 나는 당연히 너와 같이 가려고 했지. 근데 네가 없더라고. 영문을 모른 채로 과학실에 갔더니 네가 이미 도착해 있더라. 다른 친구들이랑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었어. 그러곤 너보다 늦게 과학실에 도착한 나의 기척을 느끼고,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돌렸지. 너와 나의 친구 사이가 그걸로 정리가 됐어. 


그 이후로 너는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며 나와는 친구였던 적이 없는 것처럼 굴었어. 나도 금방 다른 친구들이 생겼어. 너의 새로운 친구들은 목소리도 크고, 가진 힘도 셌지. 선생님도 무서운 줄 몰랐잖아. 너의 무리가 담임선생님께 선을 넘는 언행을 했고, 너와 네 친구들이 징계 처분을 받게 되었다고 했어. 교무실 앞 복도 바닥에 책상도 의자도 없이 쭈그려 앉아 깜지를 쓰던 모습이 생각나. 내가 근처를 지날 때마다 너희들 맨날 나 붙잡고 애절하게 물었잖아. "반장, 선생님이 우리 들어오래?" 거기에 난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아주 간단하게 너희를 실망시켰지. 약간 쌤통이라는 생각도 했어. 교실에서 좀 못되게 굴었어야 말이지. 학년이 끝나던 날, 내 롤링페이퍼에 있던 네 메시지 기억해. 너는 나를 반장이라고 부르며 상투적인 문구 몇 줄을 썼고 그걸로 너와 나 사이 거리감을 체감했어. 돌이킬 수 없겠다는.


그런 해를 보내고 3학년이 됐는데 또 너랑 같은 반이 되었어. 그때 너도 나에 관해 생각했던 게 있어? 난 좋지만은 않았어. 너랑 '한때' 친구였다는 게, 지금은 아니라는 게. 그걸 모른 체하고 학교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게 난 좀 그렇더라고. 그렇게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생태계를 구축하며 교실 안에서 잘 공존했지. 내가 너의 친구들과 친하고, 너는 나의 친구들과 친해도 우리 둘은 절대 서로의 궤도를 넘지 않은 채로 말이야. 그렇게 남은 학기를 보냈더라면, 졸업식을 앞두고 우린 롤링페이퍼를 또 썼겠지? 내용은 뻔하지, 고등학교 가서도 잘하라고. 그리고 또 시간을 한참 흘려보내고 이따금씩 묵은 기억을 들춰볼 때 너를 떠올렸을 거야. 한 때 너라는 친구가 있었다는 걸. 네가 갑자기 나를 휙 버리고 갔다고 너를 욕했을 거야. 그러다 희미해져 그마저도 떠올리지 못하는 때가 왔겠지.


근데 너는 내가 차마 푸념으로라도 욕을 못하게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랬네. 그때 왜 과학실에 혼자 간 거냐고 한 번은 물어봤다면 괜찮았을까? 너는 초라하고, 찌질해서 더 이상 친구 하고 싶지 않아. 그게 내가 예상한 너의 답이었어. 그런 말이라도 듣고 너를 떳떳하게 미워할 계기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네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날 밤, 꿈에서 너를 봤어. 그때 나는 너를 둘러싼 흉흉한 추측에 대해선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어. 그냥 네가 아파서 학교를 하루 쉬었다고만 알고 있었지. 꿈에서 본 네가 너무 환히 웃으며 온통 밝게 빛을 내고 있던 바람에 너랑 어색한 사이라는 것도 잊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 뭐야.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 안도했어. 네가 오늘은 학교에 오겠구나, 하고.


교실은 네 자리에 꽃이 놓인 그날만 큰 울음으로 가득 찼고, 다음 날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게 예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일상을 맞이했어. 교실에 들어왔더니 아무렇지 않게 다들 인사하고, 장난치고, 간식 먹고 그러고 있더라고.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싶더라니까? 나를 끌어안고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맞냐며 엉엉 울던 애는 얼굴에 울었던 기색이라곤 하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어.


학교에 가는 토요일이었어. 합창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훌렁 보냈지. 담임 선생님이 종례 끝나고 나랑 너와 친했던 다른 친구더러 교실에 잠깐 남으라고 하셨어. 너의 사물함을 정리해야 한다고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가져오셨지. 네 사물함은 원래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자물쇠가 없이 열려있더라. 미술 시간에 만든 것들, 교과서, 필기도구 이런 것들을 바구니에 담았어. 네 책상 속에 있는 짐들도 다 정리했지. 근데 바구니 말고 네 책상이랑 의자도 가져가래. 소각장으로. 친구는 바구니를 들고, 나는 책상을 들고, 선생님은 의자를 들고 걸었어. 모두가 다 빠져나가 아무도 없는 토요일의 텅 빈 복도를 지나는 시간이 무척 길었어. 소각장에 네가 학교에 남겨둔 모든 것들을 두고 오면서 계속 뒤를 돌아봤어. 차라리 소금기둥이라도 돼서 무어라도 흔적이 남아있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나 봐. 이렇게 너를 지우는 게 맞는 걸까? 다들 정말 스물네 시간도 안돼서 너를 잊어버렸다고?


다들 어쩔 줄 몰랐던 거야. 네가 너무 갑자기 사라져서 더 울어도 되는 건지 덜 울어야 하는 건지, 너를 이야기해도 되는 건지 영영 이야기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 우린 배운 게 없었어. 그래서 고개를 아래로 위로 내렸다 치켜올리면서 한동안은 너를 잊지 않으려는 게 내 나름의 애도였던 거 같아. 네가 떠나고 딱 일 년 되는 날이 오늘처럼 이렇게 장대비가 내리던 날이었는데. 이만하면 됐다는 듯 무섭게 내리는 비와 함께 뭐가 쓸려내려가기도 한 것처럼 네가 희미해졌어.


지금도 나는 너를 생각하면 애틋해야 하는 건지, 교실에 날 혼자 두고 과학실에 간 걸 떠올리면서 널 미워해야 하는 건지, 그냥 새까맣게 잊으려고 해야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좋을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너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관한 거니까. 나도 열여섯 살을 거쳐와 놓고선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지 떠올리기가 어렵네. 열여섯의 너는 어떤 걸 원해? 네가 알려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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