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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Sep 02. 2022

대기업 임원 관찰 수기(하)

 앞 글에 이어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마주한 임원들의 공통적인 특징을 끄적여 본다.


 넷째, 그들 사이에도 품계가 있다.


 동일한 직급, 직위라 할지라도 임원들 사이에서도 엄밀히 '성골, 진골' 같은 품계가 존재했다. 흔히 성골 임원이란 해당 기업의 신입 공채로 입사해 밑바닥부터 갖은 풍파와 역경을 이겨내고 '별까지 단' 그야말로 신화적 인물들이다.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해당 기업과 함께 했으며 회사가 곧 자신이요, 자신이 곧 회사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대단하며 'xx맨'으로 불리는 것을 무척 뿌듯해한다.


 진골은 '외부에서 영입한 임원'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속된 말로 '굴러온 돌'이다. 과거에는 큰 기업일수록 알게 모르게 성골 출신의 임원들을 더 대우해주는 분위기였지만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 오히려 성골 출신의 임원들이 '고인물' 취급을 받는 경우가 생긴다. 외부에서 영입된 임원들의 대부분 학업이든, 경력이든 해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오히려 한 곳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기업에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신문물을 전파하는 일종의 '메기'들로 성골 임원들에게는 위기감을 주는 경계 대상 1호들이다.


 마지막으로 성골도 진골도 아닌 그냥 다이아몬드급들이 있는데, 바로 오너가의 패밀리들이다. 이들은 성골과 진골이 사이좋게 지내든 박 터지게 사우든 '어차피 다내꺼' 같은 느낌의 여유를 풍기는 자들인데 무슨 속내를 가졌는지 제일 파악이 되지 않는 부류들이다. 가끔 언론을 소란스럽게 하는 갑질 당사자들로 노출되기도 하는데 의외로 대부분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행보를 관망하는, 조용한 자들이 훨씬 많다.


 다섯째, 그들은 눈치 백 단 이다.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너 임원의 핵심 역량이 뭔 줄 아니?"라며 물었을 때 나는 "음...... 일 잘해서 성과 내는 거요?"라고 아방하게 대답했다가 비웃음을 산 일이 있다. "능력 있어서 그 자리까지 갔으니까 성과 내는 건 당연한 거고. 진짜는 낄낄 빠빠다."


 낄낄 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능력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한참 많이들 쓰다가 요즘  Z 들은  많이  쓰는  같은데 아무튼 '눈치코치 능력' 의미하는 말로 '앉을자리와  자리를 구분하는 능력' 의미한다. 승승장구하는 임원들은 의사결정에도 타이밍이 중요시했고, 새로운 일을 추진할 때도 치고 빠져야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았다.  시점에 어떤 조직을 도와줘야 할지, 그들을 도와주고 어디까지 생색을 내야 할지, 지금 당장 생색을 내며 보답을 바랄지 아니면 묶혀두었다가 나중에 대가를 요구할지 기가 막히게 결정했다.  일을 본인이 직접 손을  밥상을 직접 차릴지, 아니면 남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살짝 숟가락만 얹을지 순식간에 잰다.  


 의외로 부하직원으로서 일을 과중하게 많이 시키는 임원보다 소위 낄낄 빠빠가 잘 안 되는 '눈치 없는 임원' 밑에 있을 때 복장이 터진다. 지금 업무에 착수해야 할 타이밍 같은데 우리 조직만 눈치 없이 소외되게 만든다던가, 의외로 실무는 이쪽에서 다했는데 밥상 자랑할 타이밍을 뺏겨 그사이 귀신같이 숟가락 얹은 조직이  공을 가로채게 두는 경우가 꽤 빈번하다. 그럴 때는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쓰린 속을 달리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영 일할 맛이 나지 않고 급기야 탈출을 도모하기도 한다.



 여섯째, 그들은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임원들은 보통 짧게는 1년-2년, 길게는 3-4년 단위의 연간 계약을 하는 '임시직'들이다. 가끔 인사 평가자로서 그들은 부하 직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우리 조직이 이번에 고과를 잘 못 받아서 승진 티오가 적으니 이번에는 아쉽지만 네가 양보하자. 내년에는 너를 꼭 챙겨줄게." 같은 제안을 하기도 하고 "내가 다른 조직에 갈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꼭 챙겨서 데려갈게" 같은 약속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약속들은 대부분 의미가 없다. 그들이 못되고 비열해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 임시직인 그들은 하루아침에 해고가 되는 경우가 빈번해 약속 자체를 지킬 수 없는 입장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당장 출근길에 해고를 통보 받는 사람부터, 인사 개편 전 날 보직해임을 통보받는 경우까지, 그들은 시시각각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늘 불 밝혀있던 그들의 집무실이 하루아침에 폐허처럼 썰렁한 빈 공간이 되는 경우가 빈번하며, 더 황망한 경우는 집무실 자체를 부숴버려 아예 흔적조차 사그리 지워진 경우다.


 그러니 그들은 약속을 지킬 수 없다. 차라리 면팀이 되더라도 끝까지 남아있는 팀장들에게는 공수표 같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로 한동안 따가운 눈총이라도 쏠 수 있지, 이건 뭐 유령처럼 사라진 존재들에게 무슨 원망과 비난을 퍼부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임원들이 하는 약속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상책이다. 이제는 머리가 굵어 그려려니 하지만 어린 시절 그걸 몰라 '높은 사람들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피눈물 많이 흘렸던 나를 비롯 수많은 개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일곱째, 그들은 외롭다.


 조직의 밑바닥에서 보면 까마득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같은 그들도 지근거리에서 살펴보면 실상 우리네 개미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더 많은 보상에 따르는 더 막중한 책임에 괴로워하며 100세 시대에 하루가 다르게 다가오는 정년이 두렵기는 그들도 우리와 매한가지다. 요즘 들어 대기업 임원들의 연령대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80년대생 임원 탄생도 더 이상 새로운 기삿거리가 아니며, 40대 초중반에 임원이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책임져야 할 직원들에게 섣불리 고충을 토로했다가는 '돈도 많이 받으면서 평사원들이랑 똑같이 징징거린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며, 반대로 동급에 다른 임원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가는 되려 나중에 공격받을 빌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함구한다. 난제에 돌파구를 찾고자 아랫사람들에게 대안을 물어보면 '답 없는 건 우리랑 똑같네'라고 조롱받거나 '제발 그냥 아무거나 결정해서 좀 알려주실래요?'라는 싸늘한 시선을 견뎌야 한다. 부하직원에게 다가가려 하면 부담스럽다고 난색을 표하고, 그렇다고 신경을 덜 쓰면 조직 문화에 무책임한 리더가 된다. 그래서 임원들은 의외로 혼밥과 혼커의 달인들이다.   


 그런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면 정말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 왕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그 자리에서 버틸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가끔은 "그 외로움 값들까지 다 연봉에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견디십시오!"라고 농을 던져도 와닿지 않으시겠지. 자고나면 물가가 수직 상승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깟 외로움이 대수랴, 그 정도 연봉과 사회적 지위면 됐지! 싶어 감히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 수도 없는 일개 개미의 대기업 임원 관찰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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