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 직속부서에 있으면 아무래도 임원들과 소통할 기회가 많다. 가까이 있다 보면 회사 생활에 대해 그분들이 터득한 비기들을 전수받기도 하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것들을 몇 가지 추려본다. 비기라고 하기엔 좀 엉뚱하고 때론 좀 시시해 보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회사 생활에서 꽤 쓸모 있었는 신박한 가르침들이었다.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껴라."
풋내기 신입사원 시절 나는 영업직이었다. 정확히는 대기업 유통 계열사의 MD였다. 흔히 협력사라고 불리는 거래처에서 물건을 소싱하고 판매하는 직무다. 어느 날 우리 회사 MD계의 신화적 존재이자, 훗날 영업 총괄 상무님이 되시는 임원분이 내게 물었다.
"OO야, 너 만약에 업체에서 네가 전혀 모르는 물건을 가져와. 그리고 니 앞에서 막 그게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막 썰을 풀어. 근데 너는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럼 어떻게 할 거냐?"
"깝니다."
간결하고 심플하며, 거침없는 나의 대답에 '뭐 이런 게 다 있어?' 싶어 어이가 없으셨는지 피식 웃으시더니 곧 호통치셨다.
"야! 무턱대고 네가 모른다고 까면 어떡하냐? 그게 진짜 대박 히트 상품일지도 모르는데! 너 그러다가 그 업체 다른 데로 넘어가서 대박 터지면 그거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러냐? 너 완전 물건 볼 줄 모른다고 업계에 다 소문날 텐데?"
"...... 그럼~ 그냥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고 실토하고~ 죄송하지만 제가 그 상품에 대해서 공부 좀 한 다음에, 다시 미팅하자고 말씀드립니다."
"야, 상품 소싱은 시간이 생명인데 네가 언제 그걸 공부하고 언제 또 미팅하냐? 그 사이에 업체 다른 데로 넘어간다니까?"
"그럼 어떻게요!!!"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일 잘하고 있는데 갑자기 다가 오셔서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시니 나도 발끈했다. ‘어이구~ 이놈 기세 봐라' 싶은 표정을 하시고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또 웃으시더니 천천히 말씀하셨다.
"잘 들어봐라. 너 그거 MD 기죽이려고 그런 걸 수도 있다. 물론 진짜 물건이 진또배기일 수도 있어. 근데 딱 봐도 네가 새파란 신입 나부랭이 같으니까 니 앞에서 너 기죽이려고 하는 거야. 막~ 더 전문용어들 언급하면서 현란하게 어필하면서 자기들 유리 한대로 마진(수수료)도 조정하려고 하는 거야. 그런데 네가 네 입으로 잘 모른다고 하면 그 순간 넌 x 되는 거야. 한 마디로 호구 잡혀서 끌려 다닐 일만 남은 거지."
"아! 그래서 제가 애초에 그냥 거른다고 했잖아요!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그런 껄렁거리는 업체들은 거래 안 합니다! 싫다고요!"
내가 세모눈을 하고 대들자,
"너 사람 가리면서 물건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그러고 까는 것도 한두 번이지! 무튼 그럴 때는 잘 들어. 내가 진짜 중요한 거 가르쳐준다."
한쪽 눈썹을 찡긋하시고는 그분은 주위를 살피며 마치 천기누설이라도 하듯이 낮은 목소리로 내게 은밀하게 말씀하셨다.
"야, 그럴 때는 최대한 말을 짧게 해. 네, 아니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로만 대답하란 말이야. 중간중간에 헛소리하지 말고 침묵하는 것도 괜찮아."
속으로 '저게 무슨 소리야?'싶었지만 겉으로는 "왜요?"라고 묻는 내게,
"네가 잘 모른다는 사실을 절대 들키지 마. 괜히 맞댓거리 한다고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분명히 들켜. 물건을 소싱할지 말지는 결국 MD인 네가 결정하는 거야. 특히 네가 어리다고 함부로 기죽이려고 하면 더 말을 아껴. 그들이 니 앞에서 한 시간을 떠들든 두 시간을 떠들든 네가 말을 아끼면 결국 그쪽도 더 이상 뭘 어떻게 못해. 오히려 초조해지지. 내 앞에 있는 이 MD가 자기 카테고리 상품에 대해서 진짜 잘 모를까? 그런 의심도 들겠지. 근데 왜 말을 별로 안 하지? 무슨 생각인 거지? 혹시 내가 하는 말에 지금 실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그들 스스로 피어오르게 너는 무조건 말을 아껴. 그리고 돌아와. 그런 다음에 따로 공부하란 말이야 이 자식아!!! 알겠냐?"
'뭐야~ 이건~?' 여전히 속으로 '저게 진짜 이렇게까지 조용히 전달할 비법인가?' 싶어 아리까리했지만 그렇다고 영업 바닥에서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말을 허투루 흘릴 수 도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남겨두고 유유히 구내식당으로 점심 드시러 가셨다.
처음에는 그저 농담이신 줄 알고 정말 한 귀로 흘리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정말 그분이 말씀하신 상황에 마주하게 되면서 나는 그때 하사하신 비책의 유용함을 실감했다. 실제로 아무리 그 카테고리를 담당하고 있는 MD라고 해도 해당 업계의 모든 지식과 동향에 정통하긴 어렵다. 꼭 경험이 부족한 신입이 아니어도 업무 중간에 담당 카테고리가 바뀌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새로 맡은 카테고리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학습해야 했는데 이미 해당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협력사 담당자들은 그런 뉴(new)MD들의 사정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큰 규모의 매출과 이익이 오가는 장사판에서 배경 지식의 부재는 당연히 협상 테이블에서 대등한 위치, 혹은 우세를 점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는 불리한 입장에서 그때 상무님의 가르침을 지침 삼아 침묵과 짧은 답변을 무기로 사용했다. 물론 열이면 열, 다 통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었다. 자칫 건방지고 무례하다는 인상을 심어 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률은 나쁘지 않았으며 상대방과의 협상에서 최소한 끌려다니는 입장은 피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묵비권 존재와 그 위력을 알게 되면서 그때 조직의 수장이자, 인생의 선배였던 상무님의 가르침이 그저 흘려버릴 실없는 가르침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십 년 가까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날의 공기와 분위기가 생생하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고 개성이 너무 돋보인다고 대기업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던 나를 그래도 밝고 맹랑하고 밥 많이 먹고 잘 웃는다는 이유만으로 참 예뻐하셨다. 그리고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깨알 같은 영업 노하우를 많이 알려주셨는데 세월이 지나 많은 것들을 망각해 버렸다. 다시 돌아간다면 더 주의 깊게 듣고 잊지 않게 잘 메모해 둘 것 같은데 많이 아쉽다.
시간이 지나 수습 기간이 끝나자 내게 고급 펜을 선물하시며 "업체들이랑 미팅하러 다닐 때는 꼭 좋은 펜을 써. 그리고 자신있게 협상해. 네가 아직 어려도 회사는 네가 할 수 있으니까 너를 뽑은거야. 항상 당당해라. 어디서든 기죽지 말고."라고 신신당부하시던 상무님의 얼굴이 여전히 선명하게 기억난다. 퇴직하신 이후 개인사가 다망하여 한 번도 제대로 찾아뵈지 못해 가끔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안부 차 연락드리면 언제나 내 청첩장을 목에 빠지게 기다리신다고 하소연하시는데, 이대로라면 아무래도 목이 빠지실 것 같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