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생활을 10년 넘게 하며 다양한 임원들을 겼었다. 그들은 통상 사업부장, 본부장, 부문장, 본부장, 유닛장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는데 일반적으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그다음의 존재들이라고나 할까? 통상 상무 혹은 전무, 부사장, 대표이사 등의 직위를 가진 분들이다. 사원일 때는 그들과 업무로 엮일 일은 거의 없다. 조직의 피라미드 가장 하단에서 수행하는 일들은 높은 자리에서 본다면 그리 신경 쓸만한 일들이 아니니까.
그러나 나의 첫 직장은 사원이 멘토가 되고 임원이 멘티가 되는 '리버스 멘토링' 뿐 만 아니라 그들과 같이 특별한 과제를 수행한다거나, 회사 생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다양한 공식, 비공식 만남들을 적극 주선했다. 그로 인해 풋내기들인 우리들이 조직에 잘 적응하고, 나아가 그들처럼 조직에 로열티를 갖길 원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을 통해 소위 바닥 민심을 수집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 지금처럼 블x인드 같은 익명 커뮤니티가 없던 시절이니 사내 다양한 가십들을 전해줄 눈과 귀, 그리고 입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리 이후부터는 업무로 직접 그들과 엮일 기회가 많았다. 당시 나의 직무가 다양한 부서와 타계열사들과 소통해야 하는 특수한 포지션이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 신사업개발과 전략 같은 일들은 대부분 쿠션을 먹지 않고 임원 직속 부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여 지근거리에서 그들의 삶과 일, 그리고 개인적인 면모까지 여과 없이 관찰할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보고와 회의 자리 배석, 출장이나 대외 업무들의 의전, 스케줄 관리까지, 무릇 수행비서 같은 업무들까지 맡으며 직속 임원뿐 아니라 유관 조직의 다양한 임원들도 접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를 일반적으로 획일화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눈에 띄는 공통 특성이 있어 나열해 본다.
임원들은 대부분 아침 회의가 많다. 우리가 생각하는 9시, 10시 같은 오전 회의가 아니라 이르면 7시, 기본적으로 8 시대에 잡히는 회의들이다. 물론 그들이 직접 소집한 회의라기보다는 '소집되는' 회의인 경우가 많다. 우스갯소리로 아침잠이 많은 사람은 절대 임원이 못 될 것이라고 농을 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이른 회의가 없더라도 임원들은 정말 일찍 일어나서 회사에 온다. 긴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없어도 일단 일찍 온다. 그리고 사내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든, 조직에서 지원해주는 외국어 과외를 하든, 회사 정원과 내부를 산책이라며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든 어쨌든 회사에 일찍 온다. 정 할 일이 없으면 신문이라도 보고 인터넷 쇼핑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굳이 회사에서.
그렇게 임원들이 일찍 와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조금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상사보다 부하직원들은 더 일찍 나와 있는 것이 K-직장인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미덕 같아서 그들의 조기 출근이 달갑지 않았다. 실제로 은근히 부하 직원들에게도 이른 출근을 종용하며 눈치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눈에는 분명히 정시 출근한 직원들도 '게으른 축'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눈치가 보여 피곤하고 불편하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 늘 부지런히 무언가를 읽고 좇는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또 분명히 전날 회식으로 고주망태가 되었는데 제일 먼저 꼿꼿이 출근해 환하게 불 켜진 그들의 방을 볼 때면 경탄스럽기까지 했다. 관찰 결과 표면적으로 그들은 모태 부지런 DNA를 탑재한 존재들 같았지만 실상 조직에서 누구보다 먼저 늘 '스텐바이' 상태여야 했기에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대부분 부지런함을 내재화한 듯 싶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다. 조직을 이끌다 보면 각 조직별로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가 많다. 수하 조직들의 업무가 겹칠 때는 나서서 교통정리도 해야 하고, 아랫사람들끼리 거친 논쟁에 고성까지 오고 갈 때면 나서서 중재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지 않는 '연합 조직'도 생기고 '적대 조직'도 생긴다. 상대방이 면전에서 본인의 조직을 강하게 공격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야 한다. 섣불리 그 자리에서 화를 내거나 언짢은 기색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자들은 결국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 그러니 속으로는 칼을 갈아도 안면에는 능구렁이 같은 미소들을 띤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이 싸웠다가 오늘은 갑자기 악수하고 웃으며 티타임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처음에는 참 어리둥절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싸워도 하루 정도는 대면 대면한데 이건 뭐 LTE급 화해 모드지 않은가. 처음에는 어쩌면 저렇게 손바닥 뒤집듯 태도가 바뀌지? 싶어서 신기했는데 곧 그 비밀을 눈치챘다. 바로 지난날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했던 조직이었어도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직 개편, 정기 인사와 함께 순식간에 본인이 떠맡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더 높은 곳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 공격할 꺼면 니가 가서 잘해봐라'라는 의중이 반영된 인사들인데 그럴 때면 팔색조 같은 태세 전환을 목도하는 재미가 솔솔 했다. 어제의 공격수가 오늘의 수비수가 되는 상황, 그들은 하루아침에 납작 엎드릴 줄도 알았고 평소 적대했던 자들과도 하루아침에 아무 일 없었듯이 바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과거에 목구멍에 가시 같아 당장 도려내고 싶은 조직이었어도 하루아침에 본인이 지켜야 할 조직으로 바뀔 수 있으니, 그들 사이에 섣부른 선긋기는 금물이었다.
중년이 훌쩍 넘은 그들을 아이돌이라 칭하기에 매우 어색함이 있지만 그들은 직원들의 아이돌이 맞다. 회사 안 밖에서 그들의 목격담이 끊임없이 직원들 사이에 오르내린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들까지 가십거리가 되는데 가령 'OO상무님이 점심때 OO식당에서 OO전무님이랑 식사를 했다더라'라는 가벼운 목격담부터 'OO 본부장님 아들이 이번에 수능을 봤는데 아주 죽을 쒀서 기숙형 재수학원에 보낸다더라, 아니다 그냥 유학 보내기로 했다더라"라는 가족사는 기본이요, "대표이사님 보고 자리에서 OO사업부장님이 전혀 핀트를 못 맞춰서 대판 깨졌다더라"라는 업무 관련된 일들까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직원들의 관심사다.
어느 날 보고를 마치고 이어진 티타임에서 당시 내 직속 임원분이 내게 말했다.
"OO아, 너는 나중에 절대로 임원 하지 말아라. 이게 여간 힘든 게 아냐. 일 많은 건 둘째치고 직원들이 나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아서 불편해 죽겠어. 세상에 어제는 내가 누구랑 어디서 점심 먹었는지까지 다 알고 있더라니까." 라며 임원으로서 본인의 고충(?)에 대해 토로했다.
입 바른 소리와는 거리가 멀고 꽤 당돌한 축에 속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의아해하시는 상무님을 향해 "아니, 상무님. 그것도 상무님 되시니까 직원들이 그렇게 관심 가져주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누가 50대 아저씨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 가져줘요? 직원들 관심이 부담스럽다고 하시는 거 이해 못 하는 거 아닌데, 그냥 이 순간을 즐기세요! 나중에 물러나시면 가족들 빼고 아~무도 정말 1도 관심받을 일 없으실걸요? 저한테 임원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저는 나중에 제가 50대에 임원 됐는데 남들이 그렇게 어디 가서 뭐 먹고 뭐하는지 관심 가져주면 엄청 기분 좋고 뿌듯할 것 같은데요?"라고 응수했다.
내 대답에 상무님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시는 듯했으나 곧 같이 빵 터지시며 "그건 또 그렇네" 하고 웃으며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그다음부터는 정말 마음 가짐을 바꾸셨는지 직원들의 임원들에 대한 은밀한 관심을 조금씩 즐기시는 듯했다. 가끔 "오늘은 애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 말하지 않아?"라며 은근히 새로 바꾼 안경이나 기타 패션 소품들을 내비치시는 귀여운 면모를 보이시기도 했다.
회사 생활에 정말 쌀 한 톨의 관심이 없지 않은 이상 우리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주변 임원들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짜 아이돌처럼 그들을 애정하고 동경해서라기 보다는 그들의 관심사, 행보, 신변의 변화 등이 바닥에 잔잔히 깔린 민초들인 우리의 밥벌이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들을 때로는 대놓고, 또 어떨 때는 은밀히 살핀다. 중년에도 많은 이들의 은근하고 내밀한 관심이 받고 싶다면, 대기업 임원을 인생 목표로 설정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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