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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Jun 28. 2020

경력 개발서를 냈다가 팀장님께 소환당했다(2)

남의 집 귀한 자식 입니다.

 거듭 '회사에, 아니 우리 팀에 불만 있냐?'라는 의도가 내포된 팀장님의 추궁 아닌 추궁에 그제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맡고 있는 채널 외 다른 채널에 대한 이해도도 높이고 싶었다. 우리 회사에서 메인으로 생각하는 유통채널에도 가보고 싶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일이냐. 그렇게 현업에서 쌓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전략을 수립하는 일도 해보고 싶었다. 인사팀에서 그건 아무나 하는 거냐고 하셨다던데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느냐? 영업 생태계도 모르면서 보고서만 써대는 기획 스텝 말고, 진짜 현업 경험이 있는 사람이 왜 전략 수립할 자격이 없냐?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글로벌 사업도 하면서 시야를 넓혀보고 싶었는데. 그게 뭐 잘못된 일이냐?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해보라고 해서 고민해서 작성했는데 제가 지금 주제에도  맞는 꿈을 그린다고 나무라는 것이냐. 내가  일을   있는지, 없는지 그건 누가 결정하는 것이냐며'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켜며 말을 이어갔는데 내 원래 의도와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것에 갑자기 억울함과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런 나를 한 참 동안 말없이 보고 계시던 팀장님은 그제야 인사팀 말처럼 내 경력 기술서가 단순히 조직에 대한 항의나 리더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는지 차분히 말씀하셨다.


 "OO님, 나는 OO님이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지금 우리 조직에서는 한 분야에 꾸준히 전문성을 쌓는 스페셜리스트를 원해요.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커리어 패스를 적었을 거예요. 지금 맡고 있는 일에서 파트장이 되고, 팀장이 되고 그렇게. 그런데 OO님의 생각을 우리가, 아니 내가 오해했네요. 아마 인사팀에서는 2-3년 단위로 팀과 직무를 바꾼다는 내용만 보고 섣불리 말했던 것 같네요. 다만 영업직이 기획직, 특히 전략 기획직이 되는 건 관례상 아주 힘든 일이에요. 조직에서 정말 탁월한 성과가 있거나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니 앞으로 더 열심히 해봐요. 나는 우리 OO님이 나중에 꼭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생각했던 바를 모두 말하긴 했지만 실은 지금 놓인 상황에 대한 당혹감과 알 수 없는 모욕감에 얼굴은 여전히 홍시감처럼 빨겠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겨우 1년 차 신입사원의 당돌한 멘트에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야단맞을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된통 꾸중을 들은 어린애처럼 닭똥 같은 눈물이 잔뜩 고인 상태였는데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 왈칵 쏟아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한동안 애처럼 훌쩍거리는 내게 "우리 OO님이 욕심이 이렇게 많은 사람인 줄 몰랐네요. 이건 고치지 맙시다. 처음 작성한 대로 제출하는 걸로 인사팀에 내가 다시 말할게요."라고 말씀하시며 마음 정리하고 나오라며 먼저 회의실을 나가셨다.



 후에 전해 듣기로는 팀장님은 곧장 인사팀에 달려가서 '신입사원이 조직에서 다양한 일 해보며 성장 하겠다는데 그게 뭐 잘못된 일이냐고 이걸 다시 써오라고 하느냐! 이렇게 직원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인사팀이 욕먹는 것이다. 그리고 뭐 기획직은 하늘에서 점지해주는 일이냐. 영업직들 무시하지 말라. 앞으로 이걸로 OO님한테 피해 주거나 눈치 주지 말고 욕심 많은 친구니까 조직에서 더 많은 기회를 줘서 다양한 경험 할 수 해줘라.' 라며 엄포를 놓고 오셨다는데 지나고 보니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일이다.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이 팀 가라면 가고, 직무 바꾸라면 바꿔야했던. 그게 조직원들의 미덕인 시대를 살아왔던 나의 동기들과 선배들과, 그 선배의 선배들이 내준 용기가 자꾸 떠오르는 요즘이다. "잘했어! 우리 OO이 회사에서 하고 싶은 거 다해!" 하며 맥주잔을 기울이며 응원해주던 동기들도 "나중에 정말 그렇게 되서 출세하면 나 모르는 척 하기 없기다!"라며 농담 섞인 말로 격려해주던 선배들도 모두 많이 그립다.


 회사에서 단순 소모품처럼 느껴질때마다. 그저 수많은 볼트와 너트 중 하나로 느껴질때마다 그때를 추억한다. 하고 싶었던 일도 많고 꿈도 원대했던 신입사원 시절의 강단과 선배들의 응원과 격려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비록 그때 제출한 경력 개발서처럼 100% 실현되진 못했지만 지금의 나는 얼추 비슷한 경로로 회사를 다니고 있다. 영업, 마케팅, 사업개발, 전략기획으로 기록된 나의 과거 이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 나는 여전히 조직의 볼트와 너트같은 일개 부품이지만,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도 많은 '꿈꾸는 볼트이자 너트'로 생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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