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매달려 논문 쓰기5
나는 영어가 싫다. 다만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과거보다 조금 더 절실하게 공감할 뿐.
내 ‘영어 싫어증’의 시작은 어린 시절 처음 영어를 접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갑자기 엄마가 윤선생 영어 학습을 시키며 주 1회 집에 선생님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현란한 그림책에 눈길이 가긴 했지만 모든 학습지의 모토인 ‘매일, 조금씩, 꾸준히’는 나의 성향과 맞질 않았다. 호기심이 많고 공상하기를 좋아하던 내게 학습지를 포함해 똑같은 것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행동들은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차라리 ‘가끔, 많이, 제대로’ 하는 벼락치기형 공부 방법으로 영어를 접했다면 결과는 조금 달랐을까? 아니, 결과는 비슷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언어 학습의 기본인 ‘반복성’과 별개로 어린 나는 외국어를 배우기에 너무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에서 선생님의 질문에 손들고 발표하는 것도 부끄러워 질문 답변 타이밍에는 그저 눈만 꿈뻑이던 것이 전부였던 아이였다. 모진 사회화를 거쳐 당차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그 쪼꼬미 시절에는 수줍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생면부지 남 앞에서 생소하고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는 영어 발음들을 과장되게, 선생님 말씀처럼 ‘감정을 담아서’ 뱉어 내는 일이 너무 싫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조용히 수학 연산을 하거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 훨씬 좋았다.
설상가상으로 내 안에는 본투비 모범생 완벽주의 강박 성향도 있었다. 손글씨를 늘 정사각형 네모 반듯반듯하게 정자체로 썼으며, 종이접기를 할 때도 각 모서리들이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했다. 영어 학습을 할 때 선생님 앞에서 단어나 문장을 제대로 못 읽어 발음 실수라도 해서 지적받으면 다시 도전해보기는 커녕 ‘틀렸다’ 혹은 ‘잘 못한다’라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입을 꾹 닫았다.
교육열이 그리 높지 않았던 동네에서 그 시절 영어는 필수 교과목도 아니었는데 나름의 선구안으로 ‘영어 조기 교육’을 시킨 엄마는 그런 내 태도에 몹시 실망하셨다. 다소 권위적이고 새침했던 선생님도 내 식어가는 영어 학습열에 한몫을 더했다. 수업은 ‘노잼’이었고 학습지와 들어야 하는 테이프는 쌓여만 갔으며 늦잠꾸러기에게 매일 아침 8시 모닝콜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전 날 몰래 전화선을 뽑아두거나 전화 수화기를 비스듬하게 해 두어 ‘무한 통화 중’인 상태로 만들어 두었다가 엄마한테 걸려 속된 말로 ‘뒤지게 혼나기’를 여러 날.
뒤늦게 권위적인 선생님 앞에서 흙빛 얼굴을 하고 수업을 듣는 나를 본 엄마가 그제야 그 동네 최고 에이스 명 강사 선생님으로 지도 선생님이 바꿔오긴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이미 영어에 대한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았다. 명 강사 선생님은 명실공히 에이스답게 내 상태를 눈치채고 영어학습보다는 아이 눈높이에 맞는 재미와 놀이를 주로 시켰고 자존심 세고 성취욕 높은 내 성향을 간파해 채찍 대신 ‘당근, 그리고 또 당근’ 전략으로 작은 것에도 칭찬 세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자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이 좀 살아났는지 슬슬 내 얼굴 표정도 밝아지고 학습 효과도 다시 살아나려는 찰나에, 아빠가 지방 발령이 나셨다.
그렇게 명 강사 선생님과도 헤어지며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영어 학습은 중단됐다.
남들처럼 영어 구전 대회에 나갈 수준은 못 되었어도 나름의 조기교육 덕뿐에 중학교 때 내 영어 교과목 성적은 좋은 편이었다. 회화가 아닌 오히려 문법과 독해 위주의 영어 교육 과정이 더 성향에 맞았달까. 재밌는 사실은 그때도 딱히 치맛바람이랄 것도 없고 학부모 모임을 하지도 않는 엄마가 나를 또 그 당시에 지방에 아주 생소했던 영어 회화학원에 등록시킨 것이다. 추측컨데 교육자들이 수두룩한 외가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아니 생면부지 낯선 사람 앞에서 영어를 하는 것도 싫어 죽겠는데 이번에는 ‘외국인’ 앞이라니. 초등학교 때보다 그나마 사회화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았던 중학생 사춘기 소녀에게 외국인들의 과장된 제스처는 부담 더하기 파워 부담일 뿐이었다. 그들이 말을 걸까 봐 무서워서 손에 땀을 흘렸으며, 회화 학원답게 나이가 아니라 ‘회화 실력별’로 반이 편성되어 있어 성인들이 섞여 있는 상태에서 ‘영어로 말하기’는 정말 고역이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그런 내게 엄마는 동갑인 사촌과 세트로 묶어 뉴질랜드 조기 유학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쓰고 보니 이 대목에서 내가 만약 외향적이고 자존심이 덜 세고, 좀 더 낯이 두꺼운 아이였다면 그야말로 영어로 대성했을 조건과 환경이 다 갖춰졌다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어쩌나 다 지난 일이고 그때의 나는 그런 아이였던 것을. 이야기가 조금 옆 길로 세긴 했는데 당연히 나는 단칼에 거절했고 사촌 혼자만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시 영어를 위한 독해, 문법, 약간의 청해에 매진했고 수능 영어도 기가 막히게 잘 봤다.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입시를 끝으로 더 이상 내게 영어를 학습할 동인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대학에서는 토익 취업 커트라인 점수를 받아 무사히 취업했다. 업무상 영어를 쓸 일은 내 이메일 주소를 쓸 때뿐이었고, 세월이 흐르며 영어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퇴화했다. 그나마 내세울 만했던 독해 능력도 단어를 잊고 영문 지문을 읽지 않으니 나날이 비루해졌다. 그래도 먹고사는데 딱히 지장은 없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정확히는 석사 논문을 써야 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