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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Aug 11. 2023

아빠이야기

23.08.09



지금은 포도농사와 자급을 위한 밭을 지으시고, 트럭을 운전하고 계신 아빠. 지난 주말을 맞아 올해로 72세를 맞으셨다. 생신날 밥을 먹으러 모시고 나가는 차 안에서 그러신다. 70세가 넘으니 트럭운전을 위한 자격심사를 매년 받는 모양이다. 올해도 검사를 받는데, 특정한 검사에서 자꾸 틀리더란다. 당신 의지가 아니겠지. 턱걸이는 아니지만 예년보다 심사를 거뜬히 넘기지 못하는 스스로를 마주한 것 같다. " 예전하고 다르더라"




난 사실 아빠의 이 말이 반가웠다. 아빠의 늙어감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그러함을 이제 받아들이시는 것 같아서다. 오래 나는 걱정이 되었었다. 딸로서 걱정하는 지점이었다. 예전 같지 않은 아빠를 당신이 받아들이기 싫어하셨다.




4년 전 암수술 이후 달라져버린 당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다. 암수술만 했으면 나았게. 이후 매년 팔과 다리관절을 병원수술방에 내주고 계시다. 올해 4월에도 왼팔 관절을 그랬다. 몸이 기계적으로도 나이를 먹고 있는 것이다. 평생을 그만큼 닳고 닳게 사용했으니까 당연도 하지만 아빠 스스로에겐 '아직은'인 것이다.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하는데 '벌써'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사람수만큼이나 다르고 신체의 기계적인 시간도 물론 누구에게나 절대적이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이다. 왜 나만 그런 것처럼. 억울해지는 것이다. 남들은 괜찮은데 마치 나만 그런 것처럼.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아파진다. 그 억울함과 아픔이 누구보다 쉼 없이 성실히 살아온 시간들로는 보상되지 않는 것인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마음이 없으신 건지 나는 알 수 없지만 아빠는 앞으로가 많이도 불안하신중이다.




전립선 암 수술 후에는 기저귀를 찼고, 지금은 그것을 착용하진 않지만 대신 무리하는 날에는 소변을 지리기도 하셨다. 다시 암이 걸릴 수 있다는 불안이 경제적인 부담과 한 몸이 되어 더 큰 불안을 낳았고, 쉬어야 하는 시간을 가만히 집에서 쉬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안,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초조, 그러나 마음과 생각처럼 따라와 주지 못하는 몸뚱이가 주는 당혹스러움이 켜켜이 쌓여가는 걸 엄마와 나는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가 일을 하는 것으로 아빠는 살았구나. 아파도 나가 집 밖에서 일을 하는 편이 아빠를 살리는 방편이었구나. 최 씨 고집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아빠는 그랬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고집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나도 그런 아빠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간들이 매년 아빠를 병원으로 향하도록 만들지만 나도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아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수 없다고는 하나 옆에서 보는 가족의 마음이 편하기만 했겠나. 가족의 이해와 걱정은 아빠 본인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결이었을 거다. 본인의 인생이니까. 내가 나의 인생을 누구를 통해 살아가지 않듯이 말이다.




차 안에서 아빠의 저 말을 들으며 나는 내심 안도했고, 공감해드리고 싶었지만 나는 또 타자이자 딸이 되어 늘 하던 말 "트럭은 이제 그만하세요"라고 밖에 말하지 못했다. 아빠도 생각하지 않는 바가 아닌 걸 알면서 또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그때 운전중이던 남편의 말이 신선했다. "아버님, 딸이 사십이 넘었어요, 사위는 오십이에요" 아직도 머릿속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빠와 사위는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아빠의 고백 같은 잠깐의 시간을 버리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 나는 여겼다. 아빠의 속이야기를 듣기란 어렵고 어려우니까.




아빠의 마음 같지 않던 가장으로서의 세월을 나는 딸로서만 보고 자랐다. 그리고 그 입장이라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살았다. 서른이 넘어 오랜 시간 내가 나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지던 어느 날에야 나를 마주하다 아빠가 떠올랐다. 한 인간으로서 아빠는 어려웠던 그 시절, 안으로 밖으로 많이 힘드셨겠구나. 술이 친구였겠구나. 그리고 내가 아빠를 참 많이 닮았구나. 마흔이 되어서야 내가 아빠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해라는 것을 시작했다. 아빠와 딸이 아닌 한 사람과 사람으로서 보자면 서로 다르겠지만 지금껏 생을 지나오며 희로애락이 그리 잔잔하기만 했겠나, 폭풍 같지 않았겠는가. 각자의 폭풍을 서로가 감당해 줄 수는 없지만 아주 조그만 틈을 내어 비집고 이해라는 다정함을 가질 수만 있다면 좋겠다. 아니, 내가 그랬으면 좋겠다. 아빠 딸이며 고집 센 최 씨인 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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