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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Aug 20. 2023

텃밭지도


23년 늦여름




아직은 무섭게 덥지만, 한 여름 같은 폭염에 매일같이 안전문자가 지겹게도 울리지만 그래도 그 한가운데가 아님을 안다. 입추가 지났다. 그걸 의식하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성큼 내 앞에 있다. 그리고 이리 더운 가운데 텃밭은 가을을 준비한다. 이러니 가을을 체감할 수는 없다해도 왜 말끝마다 가을가을 하지 않을 수 있겠나. 가을배추와 무와 쪽파를 심을 자리를 두고 봄에 심어 수명이 다한 채소들은 뿌리를 뽑아 버리고 퇴비를 주고 두둑을 다시 세웠다. 한 번에 한 것은 아니고 한 달은 족히 천천히 하고 있는데, 채소들의 수명이 봄의 것이라고 한 번에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의 시간은 달라서 가지와 노각과 호박은 아직 쟁쟁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고 토마토는 이제 매달려있는 것들을 익히고 나면 명을 다하겠다. 공심채는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뻗어가고 있어 거의 관상용이 되어가는 걸 보니 역시나 서리 전까지 볼 수 있을 것이므로 참 이쁘고 고맙다. 이런 탓에 텃밭은 쭉 길게 한 두둑이 빈 것이 아니라 군데군데 땜빵 나듯 그렇게 빈다. 봄에 텃밭지도를 그리며 이럴 것을 감안한다고 한 것인데 뭐 아직 내가 잘 모르는 것이지. 그렇지만 나는 땜빵을 메우듯 텃밭을 채우는데 재미가 있다. 모종과 씨를 뿌려두고도 한참은 초록이 언제 덮이나,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초봄을 보내고 봄비가 한두 번 내리고 나면 쑤욱 자라는 채소들로 곧 초록이 덮치기 시작한다. 한번 시작된 초록의 기세는 흙색을 점령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금세, 정말 신기할 만큼 금세다. 그리고 여름이 오면 그 위용을 떨친다. 풀들마저 가세한 밭은 고랑을 지날 때마다 종아리를 비비는 풀과 작물들로 그야말로 꽉 들어찬다. 그렇게 초록의 위용이 장마에 젖어 녹기도 하고 때가 되어 저물어가는 걸 시간차를 두고 지켜보는 늦여름을 보내며 저물 거 같지 않던 초록의 기세가 꺾이는 걸 바라본다. 이젠 내 기세가 더 좋아 줄기를 흔들어 뿌리를 뽑기도 하며 듬성듬성 다시 드러나는 흑색을 마주한다. 다시 텃밭지도를 그린다. 그리고 자주 고친다. 이것도 저것도 심을 예정이고, 이건 저기 이건 여기에 심을 예정이고. 나름 진지한 고민을 한다. 그리곤 밭에 가서는 안 되겠다며 즉흥적으로 심고 만다. 뭐가 안된다는지는 별로 설득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면 가을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수북한 초록이 짧은 시간 머물다 저물 것이다. 23.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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