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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Oct 05. 2023

보라향, 변수, 9월 어느 날

23.10.03



부모님 포도밭의 본격 포도수확이 있었던 9월. 덩달아 나도 바쁜 달이 이젠 되어버렸다. 온전히 9월은 포도밭에서 보내는 그야말로 '내 일'이 되었음을 올해는 더 분명히 알았다. 온라인판매도 하고 농막에서 바쁘게 손을 보태고 배송도하고 문의도 받고 그러다 클레임도 받는다. 그러면서 부모님과 여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는 달이기도 하며 부모님은 딸에게, 딸은 부모님에게 고맙다, 감사하다는 애정 어린 마음과 표현이 오가는 훈훈한 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폭풍 같은 9월의 수확철이 지나니 남는 것이다. 짧은 보랏빛 9월은 달고 향기롭지만 심신을 평소보다 조여 다잡아야 하는 그런 달이다.




하루 걸러 새벽같이 출발해 포도밭으로 향했다. 그럼 두 분이 부지런히 따둔 2 컨테이너정도의 포도가 농막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채비를 하고 오늘 작업할 양을 보드판에서 확인하고 포장을 시작했다. 어느 날은 배송은 없는 날이었지만 다음날 배송물량이 많았다. 작업을 한창하며 오전을 보낸 후에 일정이 좀 꼬여버렸다. 다음날 배송물량의 배송일이 쪼개진 것이다. 소량은 그대로 내일, 대부분은 며칠 뒤로. 어쩌나. 작업을 거의 해두었는데. 포장된 포도들을 그대로 둘 순 없다. 재빠르게 보드를 체크하며 머리를 굴려본다. 다음날은 비가 올 예정인 것까지 감안해, 소량인 내일 출고분을 오늘 아빠가 아닌 내가 배송을 하는 것으로 주문자와 소통을 했다. 대신 오늘 4시 전까지 도착을 해야 했다. 그리고도 남은 포도는 일정조율이 가능한 주문자와 소통해 오늘 가져가는 것으로 일정을 당겼다. 휴 다행이다. 




오늘 배송지는 한 시간반을 가야 하는 거리이므로 4시 전 도착을 위해 시간에 맞춰 출발을 했다. 그런데 출발하자마자 계기판에 경고등이 뜬다. 타이어 하나가 터졌다. 시골집에 두고 온 핸드폰을 가지러 포도밭에서 시골집으로 가는 2-3분 사이에 말이다. 핸드폰을 두고 나온 나를 탓하려다가 멈칫. 그게 무슨 소용인가. 문제는 푸는 거 아니겠는가. 옆이 찢어진 것 같진 않았고 살펴보니 못이 박혔다. 타이어교체까지는 안 해도 될 듯싶어 다행히다하는데, 긴급출동을 접수하는데 이게 산 넘어 산인 것이다. 이때 차사고로 수리에 들어간 나의 차대신 보험사에서 제공한 대차를 사용하고 있어서 생긴 문제였다. 




30분이 지나도록 긴급출동접수는 되지 않고, 그 사이 4시에 맞춰야 하는 배송이 제시간에 힘들겠구나 포기하는 순간 전까지는 애가 탔다. 시간을 맞추려고 별의별 대안을 생각하다가 긴급출동접수가 늦어지고 '뭘 해도 어차피 늦는다'하는 시점에 마음을 되려 놓았고, 늦게라도 배송하는 수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긴급출동은 거의 40분이 지나 접수가 되었고 도착까지 20분이 걸리는 상황까지 왔다. 이제 시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니 안심과 다행히 찾아왔다. 출발을 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할 때는 주문자와 어떤 방안도 해결의 수가 안되었다. 나는 오늘 출발할 수 있고 시간의 순서가 정리되니 주문자와도 방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다행히 타이어 구멍을 메우고 바람을 채우고 모든 타이어의 점검을 마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기판에 빨간등이 깜빡일 때 시작된 당황스러운 마음과 번잡스럽던 생각들은 80여분 그 사이에 생물처럼 다채롭게도 변해갔다. 하루 중 짧은 일부의 시간, 한 달에 비하면 더없이 별것 아닌 시간, 하지만 약속 앞에서는 너무도 긴 시간. 시간의 의미는 그렇게 절대적이지만 않았고 대단히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었다. 그 시간은 나의 시간이었으므로 나로 꽉 들어차있었고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열거할 수 없는 마음과 생각들로 버무려져 있었다. 퇴근시간, 밀리는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예상시간보다 더 올래 걸려 2곳에 배달을 마쳤고, 집까지 돌아오는 시간은 그 보다 더 올래 걸렸지만 두통이 있었을 뿐 참고 있던 소변을 지리지도 않았고 최백호의 앨범 '찰나'를 무한반복 들으며 오늘 하루가 너무 감사해 눈물이 날뻔했고 감동스러웠다. 그렇게 집에 왔다. 어릴 때는 삶의 변수가 괴로움인 줄 알았는데 점점 재미를 찾아가는 건 단지 나이를 먹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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