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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Oct 16. 2023

저기요, 조상님이 어쩌고.

23.10.16



지금은 내가 그 사람 중 하나였어라며 우스갯소리가 필요할 때나 꺼내는 일화이기는 하지만 나는 내심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대학시절 어느 날, 비 오는 날이었는데. 나는 종교도 없었고 특별히 사주팔자나 타로를 보는 것에도 취미가 없었으며 그러니까 뭘 딱히 의지해 믿지 않았다. 그런 반면에 뭔가에 많이 기대고 싶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비 오는 저녁 학교 후문을 나가 어딘가로 가는 중이었다.




"저기요, 인상이 좋으셔서요."

라며 두 사람이 다가왔다.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건만 그날만큼은 ‘인상이 좋은 나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인상 좋은 나는 왜 힘든가요?’ 알아보고 싶었다. 타로 같은 거나 보러 갈 것을 하필 그 기분에 그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지나치지 않고 걸음을 멈췄다. 나는 나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진 않았지만 그쪽에서 먼저 너의 아픔을 안다는 듯 나의 힘듦을 다독였다.




"조상님께 정성이 필요하네요, 그럼 돼요"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보 같은 질문을 함으로 나는 덥석 그들의 미끼를 물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할머니가 살아계셨고, 지금은 엄마로 이어져 나에겐 증조할아버지할머니까지 제사를 모시고, 아빠는 본가 뒷산에 모신 어른들의 성묘를 수시로 다니며 벌초에 게으름이 없으시다. 그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므로 내가 바보 같은 미끼를 덥석 물었던 시기에는 조상 모시기를 대충 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은 이런 생각이 실제로 들었다. '아마도 조선시대쯤에 조상들이 서운한 게 있을 수도 있겠다'




그 길로 두 사람을 따라갔다. 학교 근방의 어느 집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나를 한 방으로 불러 작은 나무밥상을 펴고는 마주 보고 앉게 했다. 그리곤 나름의 논리로 내가 힘든 이유를 설명했는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쨌든 그날 나는 조상들을 위해 제사를 모셔야 했다. 그게 나의 당시 힘듦을 조상을 달래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었고, 가난한 대학생이 현금 오만 원을 왜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정성을 빌어 내가 가진 현금을 헌납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조상이 감복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기에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걸로는 부족하지만 되는대로 준비해 볼게요"

라며 현금의 부족함을 찔러주는 걸 그들은 잊지 않았다. 너무 적은 돈이라 성의가 부족하려나, 되려 고마운 마음이 들게 말이다.




그리곤 얼마 후에 노란 한복을 주며 나에게 입혔다. 그리고 방을 옮기니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고 나는 하염없이 절을 했다. 기억나는 건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해야 효염이 있다는 말이었다. 진심으로 절을 했다. 나지 않는 땀이 야속했고 성의가 부족해서인가 보다라며 자책했고, 진심이건 말건 나는 열심히 절을 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얼마나 더해야 하나 그런 상념이 왔을 때 어느 순간 자각했다. 내가 잠시 미쳤구나. 여길 빠져나가야겠구나.




어떻게 나왔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아마도 당시 춘천에서 학교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던 1학년 때였기에 통금시간이 있었고, 그걸 핑계로 그곳을 빠져나왔지 않았을까 싶다. 얼마나 다행인가. 어디나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것은 당시도 다를 바 없었을 텐데 그래도 그리 집요하지도, 사람을 해치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사람들이었나 보다. 돌아온 제정신에 사태파악이 되고서야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고, 기숙사로 돌아와 방장언니와 친구들에게 이 사태를 나눠가져야만 했다. 혼자만 이 무거운 걸 아니 무서운 걸 안고 있을 수 없었다. 스무 살의 나는 그 두 사람을 따라 들어갈 때만큼의 배포는 실제 없었다.




그렇게 상황이 종료된 줄 알았는데 문제는 다음날부터였다. 나에게 포교라는 걸 성공적으로 한 줄 아는 두 사람은 매일같이 기숙사로 찾아왔다. 나는 그 둘을 피해 다니느라 같은 방을 쓰던 언니와 친구들을 동원했고, 덕분에 한 달을 잘도 피해 다녔다. 지방의 캠퍼스 안에서 어쩌면 내가 용의주도했는지 그들이 안일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눈에 띄지 않을 때까지 나는 심장 쫄깃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진심 무시무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너무 바보 같아서 학교를 졸업하고도 서른이 넘어서도 누구에게도 이 일화를 말하지 못했다. 창피하기도 했지만 그때 내가 왜 힘들었는지 까지 들추는 건 내키지 않아서였다. 그 둘은 세트니까.




지금은 굳이 세트로 묶지 않아도 괜찮다. 왜 따라갈 수밖에 없었는지,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는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 되었지만 딱히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기에 지금의 나에게도 별 문제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래서 한바탕 어이없이 웃을 소스가 필요할 때 나를 팔아 떠벌리는 해프닝이 되었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이 일화가 떠오를 때는 내심 생각한다. 용감했다고. 그렇게라도 나는 나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고, 그때 나름의 최선이었고 적극적이었다고. 이 이후로도 길을 걷다 "저기요.." 를 많이도 들어왔지만 이제 나는 완곡하게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 지경에서 만나도 멈칫하지 않고 패싱 하는 자세는 스무 살 그때의 교훈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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