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5
마냥 봄이구나 했던 어제와, 봄비가 내리는 오늘. 3월 말에 접어들고 봄을 몸소 느끼는 시간이 왔다. 지난 추운 겨울의 이야기지만 봄을 맞으니 겨울의 묵은 것은 마음에서는 씻어버리고, 마음에 두어야 할 건 따로 있으므로 잠시 접어둔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다. 밥집을 오픈 한지 곧 한 달이 되고 자영업도 처음이지만 매일같이 불특정 다수에게 매끼 점심을 내어주는 일은 보통의 일은 아니었다. 어른들말이 맞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부모님을 비롯해 일가친척의 어른들은 이 말을 제일 먼저 하셨었다. 잘했다, 응원한다는 또래 친구와 지인들과는 확연한 걱정의 반응은 밥집을 준비하고 있는 나로서는 크게 힘이 되지 않았다. 이 밥집이 뭐가 되어 어떻게 굴러갈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밥집의 지향이 확고했으면서도 밖에서의 응원이 꽤나 필요하다는 걸 준비하면서 나는 알아버렸다.
일부러 지금의 밥집자리를 계약하고 잔금까지 모두 치를 때까지 부모님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냥 최대한 늦게 걱정을 듣고 싶어서다. 맞다, 걱정하실 부모님 생각이 아니라, 그 걱정을 길게 듣고 싶지 않은 내가 이유였다. 새해인사를 하러 간 김에 이야기를 했다. "제가 밥집을 할 거예요" 소파에 앉아 내려다보던 아빠얼굴이 순식간에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이 오그라들며 붉어지더니 우신다. 나는 좀 당황스러웠는데,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순식간에 터지던 아빠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평소처럼 당신 마음에 안 들며 걱정스러우면 나오던 반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듣기 싫은 말이었지, 눈물이 아니었다. "그게 얼마나 고생스러운데.." 아빠도 엄마도 적잖이 놀라셨던 것 같다. 엄마는 그 놀라움과 걱정을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 아빠의 반응이 너무 극적이라 나를 위해 조절하신 걸 안다. 아빠만큼이나 엄마도 이후에는 이런저런 말들로 애타하셨다.
아빠의 눈물에 나도 그만 눈물이 터지는 바람에 남동생에게 웃으며 괜히 큰소리로 말할수 밖에 없었다. "00아, 아 참, 아빠 왜 저러시냐, 얼렁 휴지나 갖다 드려라" 어린 조카들도 보고 있는데 대수롭지 않게 보이고 싶었다. 실제 별일도 아니고. 그런데 부모님에겐 그게 딸에게 일어난 별일중에도 별일이라는 걸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무엇보다 건강체질이 아닌 것이 힘든 일을 한다는 게 제일 걱정스러우셨으리라. 내가 오랜 시간 그런 모습으로 있었다. 안 아프려고 부단히 애를 썼고, 하지만 많이 좋아진 상태로 일을 시작했지만 어디까지나 나만 알 수 있는 나의 상태였고, 두 분에게 각인된 나의 건강은 늘 위태로운 상태 그대로였을 테니까. 물론 지금도 나는 건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진행 중이고 아마도 평생 쭉 나의 루틴이라는 걸 안다. 마치 나만 아픈 사람 같지만, 나에게 닥친 일은 늘 나만 이고 가는것 같은 큰일이니까. 여하튼 부모님 입장에서는 내가 나이가 몇이든 결혼을 했든 말든 아무 소용없는 그저 품 안의 딸이었으리라. 내가 그 마음을 알 도리가 있나.
아빠는 그다음 날 저녁에도 전화해 그만할 수 없는지, 그만두기를 진심으로 권하셨다. 그다음 날에도. 엄마는 절에 더 열심히 가셨다. 일부러 인테리어공사 내내 밥집에 대한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잊어주시길 바라는 마음인양 먼저 묻지 않는 한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사가 끝나고 셀프도장작업을 시작하고 남동생이 도우러 와주면서 자연스럽게 동생을 통해 밥집소식을 들으셨던 것 같다. 나에게 묻기 뭐 하셨는지, 동생을 통해 소식을 묻곤 하신 것 같았다. 뭐 이렇게까지 서로 조심할 일인가 싶지만, 지나고서야 하는 말이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참 살아온 긴 시간이 만들어낸 서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결의 그런 끈적거림으로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런 것들로부터 나는 내가 편안할 수 있는 최선을 선택하고, 부모님도 아마 그러셨을 것이다. 아니다, 자식을 위하는 최선을 선택하셨을 것이다.
나는 아빠의 눈물을 본 이후로 사실 불편했다. 밥집 준비로 뭐라도 하나 생각할 거리를 버리려 할 때도 틈만 나면 '왜 부모로부터 응원받지 못하나' 하는 부당함이 생각으로 차오르고 그걸 정리하고 합리화했다. '차라리 무관심이었다면 나았을 것을'하며. 나의 이 불편함이 당연하다고. 사실 나대로, 부모님대로 각자의 입장에서는 들어보면 다 그럴만했다.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더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 더 힘든 것뿐이지.
밥집 오픈을 하고 일주일 후에 부모님이 다녀가셨다. 한창 메뉴였던 채식의 냉이만둣국을 끓어들였고, 생소한 맛이지만 깔끔하고 정갈하다고 하셨다. 이제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체로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시지는 않았지만, 이후에 여쭤보니 영업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인 것에 안심이 되셨단다. 아침부터 밤까지 종일 주방에 메어 있는 줄 아셨던 거다. 점심만 내고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하셨다니 그저 딸걱정이 전부셨던 것.
나는 아빠의 눈물을 본 이후 아침기도마다 부모님에게 싫은 마음이 든 것을 참회했다. '부모의 마음'이라는 그 영역을 내가 다 알 수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밥집에 다녀가신 후에 알아졌다. 내 생각만 다 맞는 바람에 두 분의 마음이 안중에 없었구나. '그래도..'라며 끝끝내 손아귀에서 놓지 못한 나의 생각이 스르르 사라졌다. 그냥 이 세상에서 나를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제일일 부모님의 마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게 다였다. 왜 그러시냐, 이렇게 할 수 없으시냐.. 따져 물을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니 두 분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 이해하지 못한 죄송함. 두 분께 전화를 드리고
"아빠, 엄마. 마음 이해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진심이었다. 이렇게 털고 나니 이후로는 어떤 싫은 마음도 차오르지 않았다. 지금도 아빠는 매일같이 저녁에 카톡으로 오늘은 어땠는지 안부를 물으신다. 이제 과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냥 아빠의 마음이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것도 아니다. 아빠의 마음이 매일의 안부카톡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싫을 것이 없다. 굳이 좋을 것을 찾으라면 '감사함'. 감사하여 또 감사하게 되는 그런 나를 만난 것이 또 감사할 뿐. 사랑합니다, 엄마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