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현 Apr 11. 2019

내가 사는 방식

너무 TMI인 내용


1. 여행 갈 때 안대와 귀마개를 꼭 챙기는데, 잠자리가 바뀌고 숙면을 취하려면 소리와 빛의 차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늘 안대를 끼고 잔다. 심한 불면증에 시달릴 때 쓰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도 쭉 쓰고 있다. 집에는 시계가 없다. 똑딱거리는 소리는 의식하게 돼서 싫어한다. 평소엔 늘 잔잔하게라도 음악을 틀어두지만 잘 때는 그 어떤 소리도 없게 한다. 공기청정기도 수면모드로 두어 아주 조용하다. 샤오미 공기청정기는 작동 중이라는 초록색의 아주 작은 불빛도 완전히 끌 수 있어서 아주 좋다. 켜고 끄는 멀티탭의 빨간 전원도 가려두었는데, 전원 불빛이 빨간색이 아닌 멀티탭을 팔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방에는 암막 커튼이 쳐져 있다. 그러니까 침실에는 어떠한 빛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거기에다 안대까지 끼고 자는 것이다.

2. 부드러운 파자마를 좋아한다. 헐렁하고 보들보들한 잠옷이 옷장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여러 개 입어보았지만 무인양품 파자마가 역시 으뜸인데, 여자 잠옷은 딱히 예쁘지도 않은데 목 라인이 좁고 허리라인이 들어가 있으며 주머니가 없다. 그래서 남자 잠옷 S 사이즈를 사면 딱이다. 겨울 용, 여름 용으로 잠옷이 5벌 있다. 꼭 위아래 세트로 입는다. 하지만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모두 벗고 팬티와 끈 민소매 한 장만 입고 맨몸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한겨울에는 (여름이 아니라) 팬티만 입고 자기도 한다. 그 이유는 다음.

3. 이불커버와 베개 커버가 아주 많은데, 더러워지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갈아준다. 제일 중요한 건 역시 촉감이다. 깔끄럽거나 뻣뻣하거나 매끄러운 질감은 싫다. 앞서 말한 잠옷과 비슷한 재질의 부드러운 천으로 이불과 베개를 싸서 맨몸으로 그 따뜻한 사이로 쏙 들어가면.. 거기가 천국이다. 촉감이 비슷하니 잠옷을 이불로 바꿔 입고 자는 거라고 할 수 있겠다.

4. 샤워를 하고 나면 수건으로 몸을 닦지 않고 목욕가운을 입는다. 물기를 하나하나 닦지 않고 그냥 바로 걸쳐 입고 나와 물 마시고 얼굴에 스킨로션 바르고 그러다 보면 몸의 물기가 자연스럽게 마른다. 나는 몸에는 바디로션을 바르지 않고 심지어 바디워시도 사용하지 않은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긴 여행 중에 배낭이 무거워 샴푸만 들고 다니느라 몸에 쓸 것들을 사지 않았던 것이 계기였고, 점점 오히려 덜 건조해지는 걸 보며 쭉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특정하게 더러운 경우는 제외) 그래서 여름에도 샤워를 하루에 두세 번 하는 경우에도 그냥 몸에 물만 슥 뿌리고 헹구고, 한 3분 걸리나, 목욕가운을 걸치고 나와 소파에 앉아 오렌지 주스 한잔 마시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5. 빨래 개는 것을 좋아한다. 바삭바삭 깨끗하게 마른 빨래를 앞에 두고 하나하나 천천히 개는 건 뭐랄까, 명상에 가까운 기분인데, 그중 최고는 수건 개기다. 네모난 수건을 똑같은 방향으로 착착 접어서 개고 새 수건을 욕실 앞에 착 쌓아두는 넉넉함. 지금 쓰는 수건이 다 닳으면 똑같은 색으로 여러 개 맞춰 사고 싶다. 호텔 수건처럼. (아, 그렇다고 엄청 각까지 맞춰서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꼼꼼한 타입은 아니다. 잘 접혔으면 됐지 뭐) 다만 빨래를 하고-너는 것은 싫어한다.. 예전에 즐겨듣던 지대넓얕이라는 팟캐스트에서 '빨래'라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거기서 '빨래가 세탁기에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때가 빠지는 것을 보는 게 좋고, 설거지가 즐거운 사람'은 '닦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빨래를 개거나 물건 정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엄연히 따지면 나는 빨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개는- 빨래를 정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언젠가 꼭 건조기를 사고 싶다.)

6. 손톱 발톱을 천천히, 꼼꼼히 깎는 걸 좋아한다. 약간 높은 곳, 책상이나 테이블에 휴지를 깔아두고 발을 올려서 발가락 모양을 신중하게 가깝게 보면서.. 발톱 안쪽까지 깔끔하게 다듬는다. 손톱도 깨끗하게 자르는 게 좋다. 네일이나 매니큐어, 반지 등을 전혀 하지 않는다. 손은 아무것도 없이 깔끔한 게 좋다. 손을 많이 쓰는 직업이니 핸드크림을 신경 써서 바르려고는 하는데, 습관이 잘 들지 않는다. 일 년에 핸드크림 백 개 쓰는 것 같은 친구를 보면서 늘 다짐 중이다.

7. 나는 혼자 살고 있는데, 집을 보면 요즘 내 상태가 어떤지 티가 난다. 집이 엉망진창 개판인 (친구들은 그거 니 기준에서나 그렇다고 말하지만) 경우는 오히려 고민도 없고 할 일도 없어서 게으르고 나태해져 감각이 무뎌진 상태. (혹은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마감에만 찌들어 살 때) 집에서 밥해 먹고 설거지가 잔뜩 쌓여 넘칠 때까지 놓아두거나 배달 음식을 먹고 쌓인 플라스틱들도 잔뜩 쌓여있다. 이때는 집이 너무 싫다.

반대로 완벽에 가깝게 (이건 내 기준에서) 깨끗한 경우는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있을 때다. 정리 정돈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기분을 진정시킨다. 내 물건들은 모두 그 만의 제 자리가 있는데, 용도가 확실히 있어서 웬만한 물건은 거의 매일 사용한다. 사용하고 나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물욕도 많고 집에 물건이 많은 편이라 절대 미니멀리스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미니멀- 그 기준은 개개인마다 다르다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진 물건들이 어떤 이유로든 내게 필요한 것들이고 잘 사용한다면 그것도 나름의 최소화된 소유가 아닐까. 이 집에 이사 온 이후로 2년 넘게 인테리어가 거의 그대로인데, 모든 게 위치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용한 것들을 다시 돌려놓고 먼지를 닦고 흐트러진 틈을 맞춰두고.. 그러다 보면 집은 제자리를 찾아 평화로운 모양이 되고, 마음에도 안정이 온다.

8. 이렇게 쓰고 보니 꽤나 깔끔하고 청결하고 까다로운 것 같지만, 사실 별로 그렇지 않다. 여행을 가면 허름하고 낡은 숙소에서도 잘 자고, 길거리에 대충 앉기도 하며 삼일 내내 씻지 않고 집에만 있는 경우도 많다. 그저 내가 사는 방식의 부분일 뿐이다. 너무나 개인적인 나의 습관과 취향일 뿐, 이런 것들은 정답도 정론도 없다.

나는 이런 크고 작은 행동들이 겹겹이 쌓이고 수없이 반복됨으로써 삶의 리듬이 유지된다고 믿는다. 당연히 완벽하게 하지 못하며 자주 흐트러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질러진 방에 물건들을 작은 것부터 하나씩, 천천히, 제자리로 돌려놓듯이. 손톱 발톱이 길지는 않았는지, 베개 커버를 갈 때가 되지는 않았는지, 식물에 물을 줄 때가 됐는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내 생각과 사람들과의 관계, 하고자 하는 일과 다짐들을 천천히 다시 본다.

9. 어젯밤에 베란다를 청소했다. 겨울 동안 미루고 미루며 커튼 뒤로 없는 척 안 보이는 척 버려두다시피 했던 공간이었다. 상상이상으로 더러웠고 물건을 엄청 버리고 물티슈 반 통을 다 쓸 만큼 먼지를 닦아냈다. 드디어 널찍해진 베란다에 식물을 옮겨 두고 물을 준 뒤, 샤워를 하고, 목욕가운을 입고 나와 김사월씨 노래를 들으며 빨래를 개고, 새 파자마를 입고 손톱 발톱을 깎고 나서 물을 끓여 따뜻한 물을 한 컵 마시고, 모든 불과 소리를 끄고 맨몸으로 침대에 누워 잠들려고 하니- '너무나 기분이 좋아서' 이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오늘 엄마가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신다. 며칠 누군가와 같이 사는데도 삶의 리듬을 잘 지켜냈다. 엄마가 가면 집이 더 정돈되겠지만,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엄마가 가면 꽤 쓸쓸하고 많이 보고 싶을 것 같다. 외로움에 무뎌지기 위해서도 나만의 사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러니 또 며칠이 지나면, 금세 허전함을 잊고 살 거다.

_

2019 04 11




매거진의 이전글 니 그래 말하는 거 보믄 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