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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지현 Nov 08. 2021

자기소개가 아무리 별로여도

아직도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처음 간 교실에서 혼자 앞에 서있던 그날들. 생경한 교실 분위기와 낯선 선생님, 그리고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나를 바라보던 그때. 쿵쾅대는 심장과 바싹 말라가는 혀, 파들파들 얕게 떨리는 손가락과는 다르게, 내 입은 늘 하던 말을 하듯 자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원치는 않았지만 자주 반복해서 몸이 암기해 버린 문장들이었다. 초등학교를 4번 옮긴 어린이가 전학 간 첫날마다 치룬 자기소개 시간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 어린이는 잘 알지 못하는 부모님 형편 때문에 이사를 많이 해야만 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 유독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같은 지역에서 이사를 한 것이 아니라 아주 딴 동네로 이사를 했다. 서울시 강서구 - 서대문구 - 분당 - 일산 - 다시 서울시 은평구로. 아무튼 그 덕에 초등학교 시절은 단편적으로 끊어져 있다. 1년 혹은 2년 단위로. 아마도 그때 배운 인간관계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학생에게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어, 선택의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새학기라도 이미 전 학년부터 아는 아이들 중심으로 그룹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다, 다른 동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새로운 아이가 받아 들여지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학기 초엔 내게 먼저 손 내밀어주는 아이가 곧 친구였다. 성격이 맞거나 좋아하는 것이 비슷해서 혹은 집에 오는 길이 같아서와 같은 이유로 친구가 된 것이 아니었기에, 관계가 오래가진 못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나았다. 쉬는 시간이면 무리 지어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다행인 것은 어느 동네든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 수록 경계심을 풀어갔고, 학기 중반 쯤이 되면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면서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다음 해엔 또다시 새로운 학교에서 자기소개하고 있기가 일쑤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3월.

은평구의 오래된 동네로 이사를 했고, 전학 간 학교는 곧 졸업을 하게 될 학교였다.

6학년 3반의 교실 앞에 섰을 때의 분위기는 참담했다. 이제 곧 졸업인, 말년병장 분위기의 애어른같은 아이들에겐 기대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감 없기는 전학생도 마찬가지였다. 교탁 앞에 혼자 서서, 2년전에도 있었던 익숙한 상황을 다시 치르고는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1년만 지나면 헤어지게 될 텐데, 쓸데없는 힘 빼기는 싫어, 라고 13살은 생각했다. 5년동안 만남과 이별만 4번을 겪고나니 냉소적인 어린이가 되었나 보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 먼저 손을 내밀어준 아이는 반에서 인기있는 여자 아이였다.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던 그녀는 요즘의 인싸같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게 적극적으로 다가왔고, 서로의 취미도 비슷해서 우린 빠르게 친해졌다.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그녀 덕에 나는 매일 아침 우유 당번과 합창부 활동을 하고, 주말이면 등산 모임에도 참가하는 등 활발한 6학년 생활을 보냈다.


그리고 여느날 처럼 그녀가 우리 집에서 놀다 간 날의 저녁이었다. 책상 서랍 속 돈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안 곳곳을 다 찾아봐도 돈은 나오지 않았다. 돈을 잃어버린 서랍은 그녀와 있을 때, 스티커 같은 것들을 꺼내면서 몇 번 연적이 있었다.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돈의 액수는 많지 않았지만, 당시엔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겁이 났다. 괴로운 마음으로 결국 엄마에게 털어놓았고,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말았다. 엄마는 혹시 모르니, 그녀가 돈을 가져간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해보자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그녀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던 이야기를 꺼내며, 사람을 믿기 전에 잘 알아봐야 한다고도 했다. 갑자기 내 친구는 도둑이 되어 있었다.


밤 9시,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으셔서 그녀를 바꿔 달라고 했다. 친숙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났다. 눈물은 울음이 되었고, 흐느끼는 목소리로 서랍 속의 돈을 가져갔는지 물었다. 그녀는 처음엔 아니라고 했지만, 나중엔 인정했다. 이날 밤 우리는 둘 다 수화기를 눈물, 콧물 범벅으로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의 책상 서랍 속에는 잃어버린 금액의 돈이 반 접힌 상태로 있었다. 고개를 들어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다른 아이들과 밝게 웃고 있었지만, 내게는 고개를 돌렸다.


그날 이후 그녀와 난 함께 놀지 않았다. 그날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다시 얘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작은 집들이 모여있던 언덕 위의 동네에 집이 있었다. 부모님이 맞벌이하셨고, 외동이어서 집은 늘 비어있었다. 문방구나 슈퍼에서 작은 물건들을 슬쩍하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대하지 않았던 초등학교 6학년 생활을 환하게 만들어준 하나의 세계였다. 그녀를 잃는 것은 그 세계를 통째로 잃는 것 같았다. 그날 밤, 그녀에게 전화하면서 울었던 건 이런 예감을 했던 걸까.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자리는 드물다. 어쩌다 그런 순간이 오면 예전의 그날들이 떠오른다.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대지만, 암기한 문장을 말하듯이 태연하게 자기소개하던 초등학생의 모습이. 그때처럼 수십 개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어깨는 자꾸 움츠러들겠지만, 믿고 있다. 자기소개가 아무리 별로여도, 그녀처럼 나에게 귀 기울여줄 단 한 명은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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