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지현 Mar 06. 2024

올해의 양말

양말을 좋아한다. 면으로 된 목이 긴 양말, 계절에 상관없는 두께의 양말을 해마다 두세 켤레씩은 산다. 양말은 봄, 가을 두 번씩 사는데, 나름 그해 패션의 s/s, f/w의 포문을 양말로 연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양말을 올해는 한 켤레도 사지 못했다. 12월인 지금까지 올해의 양말은 없는 셈이다.     


양말을 한 켤레도 사지 못한 것을 깨달은 건, 건강검진을 받던 날에서였다. 남자, 여자 나뉘어 간 탈의실에서 여성용의 분홍색 검진복을 갈아입으면서, 홀딱 벗은 몸을 검진복으로만 겨우 가리면서, 그래도 내겐 양말이 있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다. 짧은 검진복 바지 아래로 드러난 양말을 당당하게 내밀면서 탈의실을 나왔다. 오늘의 양말은 옅은 갈색과 초록, 베이지색의 체크무늬가 우아한, 아이보리색 면양말이었다. 대부분이 신경 쓰지 않은 희거나 검은 양말, 심지어 맨발이었기에, 내 양말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신체 계측을 하기 위해 대기 의자에 앉아 양말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양말의 오른쪽 엄지발가락 부분을, 자세히 보았다. 구멍이 뚫리기 직전이었다. 아직 뚫리진 않았지만, 뚫리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 그렇게 건강검진 시간은 시작되었다.     


차라리 벗어버리면 편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신고 있었던 건 오늘이 이 양말과의 마지막 날이 될 것 같은 예감에서였다. 언제 이렇게 양말이 닳은 거지, 속으로 셈을 해보니 올해가 햇수로 4년 차의 양말이었다. 여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계절에 양말을 신다 보니, 4년 차면 여러 번 신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특히 좋아하는 양말이라 다른 양말에 비해, 더욱 자주 신겨졌을 테니, 수명을 다 했을 만하다. 머릿속에 양말 서랍 속 양말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체크무늬 양말과 같은 연차인 보라색 바탕에 흰색 영문 글씨가 쓰여 있는 양말, 그리고 베이지색 바탕에 하얀 라마가 수놓아진 양말은 3년 차, 짙은 보라색에 목 부분부터는 푸른 빛 보라인 양말도 3년 차, 복숭아뼈 부분을 민트색으로 길게 물결치듯 덮고, 금색실로 얇은 테를 두른 양말과 남색 바탕에 모자를 쓴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양말이 2년 차, 그리고 회색 바탕에 판다가 뛰노는 양말이 1년 차이고. 기억이 여기서 끊어졌다. 더 이상의 양말 업데이트는 없었다. 그렇다. 올해는 봄도 가을도 (새로운) 양말 없이 지나가 버린 것이다.     


양말 하나 가지고 왜 저러나 싶겠지만, 내게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검진복을 입고, 구멍 뚫리기 직전의 양말을 신은 채로 검사실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골똘히 한 가지를 생각했다. 올해 양말 구입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뭔가 한 가지 몰두할 게 필요한 환경이기도 하니까.     


올 해 상반기에는 바쁘고 정신이 없었다. 지금까지 게으르게 지냈다며 세월이 날 재촉하려 했던 건지, 갑작스레 여러 일들이 닥쳐왔다. 1월에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2월에 이사했고, 3월에 첫째를 초등학교에 입학시켰고, 7월에 출판사를 통해 책이 나왔다. 처음 겪어보는 일들을 계속해서 새로이 마주했다. 새로운 일들을 마주할 때마다 잘 겪고 지나가기 위해 담대해지려 했다. 담대하게, 이전에도 겪어봤던 것처럼, 아무런 티를 내지 않고 보냈다. 그러나 잘 보냈으면 괜찮아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나보다. 담대하게 행동해온 몸과 달리 마음은 쉽게 적응하기 힘들었다. 이제는 지나갔다고 생각했을 때쯤 다시 반추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지난겨울을, 올해의 봄과 여름을 몸과 마음 모두 바쁘게 흘려보냈다.     


봄과 여름을 거칠게 흘려보내면서, 점점 자신도 거칠어져 가는 걸 느꼈다. 시간을 보내는 일이 그냥 보내지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여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일단 부딪치면서 위기만 넘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의 상처?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잊혀질 거라고 믿으며 시간에게 뒷일을 맡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앞에 놓인 수많은 일들을 끝내지 못할 것 같았다. 작은 고비마다 쉽게 마음이 무너져버린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여려질 것 같은 마음엔 빗장을 걸었다. 너무 슬퍼하지도 말고, 너무 기뻐하지도 말아라. 감각하지 말아라. 이때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9월이 왔고, 조금씩 하늘이 높아짐을 느꼈다. 아침, 저녁에는 이따금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했다. 뜨거운 태양을 견뎌낸 후, 만물이 성장하고 깊어지는 이때에, 나는 혼자 소화시키지도 못할 뜨거움을 삼켜버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언제든 누군가 건드리기만 하면, 뱉어버릴지도 모를 모양새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PMS(월경전증후군)라는 증상으로 찾았지만, 심신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첫째와 둘째 때 모두 진료해주신 의사 선생님을 오랜만에 만났다. 배 속에 아기 없이, 단 둘이서만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첫째와 둘째의 안부를 물어주시는 선생님은 여전히 투박한 듯 다정하셨다.


“지현씨, 오랜만에 오셨는데, 생리전증후군이라. 어떻게, 막 화가 나고 그러나?” 호탕한 성격의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를 듣는데, 정신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하하하, 엄마가 화내고 그러면 어떡하나~ 애들은 어떡해, 불쌍하네에? 지현 씨~ 교양 있는 사람 아니에요?”

“네? 하하하, 그러게요...”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수록 내가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찾게 된 건지, 의문만이 남았다. 그리고 일단 병원 처방을 받기 전에, 다른 방도는 없는지도 알아보기로 했다.

“갑상선이나 간 기능이 떨어졌을 때도 비슷한 증상이 있을 수 있어요. 그 부분도 한 번 알아봅시다.”라는 선생님의 권유로,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다.     


검진센터는 한 해가 가기 전에, 뒤늦게 건강검진을 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 붐볐다. 12월은 건강검진센터가 가장 붐비는 달이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른 아침부터 이곳을 찾은 이들은 한 해를 마무리하며 자신의 몸 기능을 점검한다. 나 또한 수년간 돌아본 적 없는 몸을 점검하러 왔다. 그동안 괜찮을 거라고 안심하며 소홀히 대해 온 건 아닌지, 몸 구석구석 확인을 한다. 그리고 마침 구멍이 날 뻔한 양말 덕분에,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도 함께 점검한다.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양말을 고르는 여유가 내겐 없었다. 양말을 통해 느낄 수 있던, 남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즐거움을 놓치고 있었다. 사소한 것들 속에 중요한 핵심이 있다는 걸 왜 늘 잊고 사는 걸까?     


올해의 양말은 12월에 사야겠다. 봄, 가을에 사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양말 쇼핑 루틴을 깨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경단녀의 희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