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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로 Sep 01. 2020

문득

종각역 4번 출구에서


  종각역에서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그 날. 우연히 시간이 많이 남아 역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고, 나는 남는 시간을 활용해 한 가게에 들러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계획했다. 그리고 퇴근 후 비로소 도착한 종각역 4번 출구, 지하철에서 내림과 동시에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오랜만에 와서 드는 감정인가, 오늘 좀 피곤했었나 생각하며, 태연히 계단을 올라섰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을 디디고 나서야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이 우리의 장소였었다는 사실을. 




 이별은 나에게 당혹스럽게도 갑자기 찾아왔다. 3년간의 시간이 단 한마디, 한순간에도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너, 눈 앞의 벌어진 단순 명료함에 황망해져 아무 대답이 없던 나. 다시금 생각해보니 마지막까지 나는 너에게 실망스러운 존재였다. 어쩌면 너는 마지막까지 나의 절실함, 너의 격렬함을 아직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너의 기대와는 반대로,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유일하게 한 가지 행동을 하긴 했었다. 너의 말에 긍정을 표하듯, 고개를 약간 끄덕이는 그 짓.


 사람이 가장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어떤 상황에 대해 '내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또는 내가 하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나는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이 문장을 스스로 되뇌고, 되뇌다 결국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한 가지 찾았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술잔을 기울이는 것. 장기간의 연애를 끝낸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술자리를 시작한 지 1시간도 안되어 인사불성이 된 내 모습을 보며 당황스러워했다. 실제로는 혀가 꼬인 말투였겠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분명히 외쳤다. "내 핸드폰 뺏어. 나 전화할 거야 분명히 제발 빨리 뺐어 제발 제발 제발." 뜬금없는 간절함에 친구 중 가장 멀쩡했던 A가 내 재킷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본인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친구의 행동에 묘한 만족감과 불만을 동시에 느끼며, 눈 앞이 아득해져 감을 전신으로 느꼈다. 


 그래 사실 그 이후로도, 그런 식의 술자리는 반복되었다. 하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 보니, 그럼에도 나를 만나주는 내 친구들이 새삼 놀라울 다름이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별은 희미해지고 우정은 두터워져 갔다. 그리고, 내가 입었던 상처는 슬며시 아물어 갔다. 예상치 못하게 큰 흉터가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몸에 새겨진 흉터와는 다르게, 마음에 새겨진 흉터는 피부과에서도 소견을 쉬이 내어 보여주지 않는다.



 생각이 더 이상 깊어지기 전에, 종각역 4번 출구를 급하게 빠져나왔다. 매일매일 머릿속에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 네 생각을 억지로 참아왔던 나였기에 그것을 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우리'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간 너무나 행복했었다. 연애를 시작할 무렵, 너의 집과 나의 집의 중간 장소가 이 곳이라는 걸 문득 깨달으며 기뻐했었다. 사실, 나의 집은 역에서 거리가 좀 있어서 20분 정도 더 걸리는 장소였지만, 네가 기뻐하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 처음이었던 청계천 연등축제, 많은 사람들 속 연등에 비친 네 밝은 웃음은 어두웠던 내 마음을 환하게 밝히기에 충분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이 추웠던 그날, 내가 혹시나 해서 챙겨 온 핫팩을 받은 너도 조금이나마 따뜻해졌었을까. 3년간의 세월만큼이나, 많은 만남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대화와 감정들이 이곳에 축적되어갔다. 연인 간의 사랑은, 특정한 장소에 특별한 기억을 쌓아감으로써 비로소 깊어져 간다고 생각한다. 소복이 그리고 차분히 내리는 겨울 무렵 하얀 눈처럼, 우리의 기억들 또한 그렇게 조용히 쌓여만 갔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빠져 서있었다. 너무나 오래 서있어서 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새로운 시야 속 장소 곳곳에서도 너와의 '문득'이 잔인하게도 한 아름 찾아왔다. 너와 걸었던 포장마차가 펼쳐진 거리, 네가 좋아하던 파스타를 잘하는 음식점, 소파가 편하고 아메리카노의 쓴 맛이 특히 좋았던 카페, 사람이 없어서 가끔은 전세를 낸 것처럼 볼 수 있었던 영화관까지. 내가 걷는 걸음만큼이나 다양한 기억들이 끝없이 찾아왔다. 


 아, 이제는 다 아물어서 그냥 흉터가 되었다 착각했었다. 스스로의 미련함을 후회하며 결국에는 다시 멈춰서 버렸다. 그리고 도로와 인도를 가로막는 철로 된 구조물의 손잡이를 잡고, 한참 동안이나 내가 지나온 출구 방향을 응시했다. 마치, 그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네가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있다는 듯이.


 하지만, 사실 알고 있다. 너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의 문득은 끝없이 반복될 것이다. 내가 후회했던 그만큼이나 오래. 그래, 내가 미안했던 그만큼이나 오랫동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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