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로 Sep 03. 2020

주저함에 대하여 1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를 수 차례 들으며, 쓰다.


 '좋아 생각한 대로만 얘기하면 돼, 사람도 지금 몇 없으니까... 지금이 타이밍이야!' 나는 방금 한 말을 몇 초만에 잊어버린 듯이, 수십 번 같은 말을 되뇌었다. 집에서부터 준비해 온 간단한 멘트였지만, 100번도 더 읽고 외웠던 것 같다. 강의실 안에서 하도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대화를 나눌 만큼 친한 친구가 아직은 없기도 했다. 그렇게 101번째 정도 같은 대사를 반복했을 때, 비로소 네가 강의실로 들어왔다. 아직 수업 시작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소수의 여유로운 친구들 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평소에 앉던 대로 둘째 줄 왼편 자리에 앉아 짐을 푸는 너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저.. 저기! 친해지고 싶습니다!!" 긴장한 목소리가 작은 강의실 속에 큰 침묵을 가져왔다. 다행히 그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생생히 들을 수 있기에는 충분할 정도의 적막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다린 것은 그 수군거림이 아니라 그녀의 대답이었다.

 "음.. 좋아요!" 긴장한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내 눈을 바라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대답했다. 그날따라 그녀의 눈동자가 더 빛나는 것만 같았다. 문득 부끄러워져 아까의 용기가 오갈데없이 사라진 듯 눈을 피했다. 


 우리는 그런 나의 부자연스러운 접근에 힘입어, 자연스럽게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같은 과 사람들은 해외 토픽이라도 본 듯이 많이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평소에 말없이 조용한 성격이던 내가, 용기를 내서 여자에게 먼저 다가갔다는 것보다 훨씬 화제가 되었던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가 지나치게 미인이라는 것이다. 또, 그녀에 비해, 내 외관은 한 없이 초라하다는 것이었다. 곧게 뻗고 윤기가 나는 검은색 긴 생머리가 자랑거리이던 너, 큰 눈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더불어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웃음을 갖고 있는 너, 평소에 운동을 즐겨해서 그런지 늘 건강하고 마른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너, 그런 너에 비해 나는 한 없이 초라한 20살의 평범한 남자애였다.

 비교가 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지라고 스스로도 짙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너와의 만남은 더더욱 긴장에 연속이었던 것 같다. 물론, 긴장과 더불어 느꼈던 감정은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은 감정이었다. 너와의 시간은 누가 시간이라는 개념에 짓궂게 장난이라도 친 듯이 1시간이 1분처럼 흘렀었다. 네가 가끔 장난 삼아 내 손이나 어깨를 살짝살짝 건들 때마다 내 심장은 세차게 뛰곤 했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맑은 날 파란 하늘 속을 한 없이 흐르는 맑은 뭉게구름처럼 흘러갔고, 다행히-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학교 사람들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봐주기 시작했다.


 나보다 한 살 연상이었던 너는, 1학년 때 이미 CC를 한 차례 경험해봤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전 남자 친구가 나와 같이 용기 있었던 나와 같은 과의 선배였다는 부연설명과 더불어, 현재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진지하게 덧 붙였다-고 했다. 입대하기 일주일 전 즈음, 선배는 한 가지 생각을 확실시했다. 바로, 그녀가 본인을 기다리는 것은, 예쁜 젊음을 즐겨야 할 그녀에게 있어 큰 잘못이라는 사실을. 그녀와 상의 없이 멋대로의 생각과 결론이었지만, 선배는 그 생각에 따라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었다고 한다. 물론 차분하지는 않은 자리였었고, 선배는 큰 덩치가 무색하게 어린아이가 울듯이 서럽게 울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길고 길었던 울음 와중에도 청유의 진정성과 의사가 강했었기에, 그녀는 마침내 그 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 또한 어린 소녀와 같이 눈물을 한 아름 흘렸다는 건 굳이 재차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행동과 더불어 과 내에서 그 선배는 멋진 사람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나는 미처 만나지 못했었지만, 만나봤던 사람들은 운동과 공부를 더불어 잘했던, 착한 형으로 그를 기억했다. 

 "연락은 안 와? 군대 가면 적적해서 한 번쯤 할만할 텐데." 아니라고 대답해 라고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연락? 음... 전혀 안 와. 사실, 그래서 그런지 좀 더 괘씸했었어. 그리고 한참 그러다가 아무 생각도 안 난 지 좀 오래됐어." 태연하게 그녀는 대답했다.

 "그 선배도 이제 전역할 때 된 거 아니야?" 내가 되물었다. "뭐 그럴라나. 관심 없어." 역시나 무심하게 그녀의 대답이 이어졌다.

 사실 이때,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나는 진심으로 기뻐했었고, 이후에 건너들은 말들에 의하면 그 선배의 대한 언급들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 선배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 이상으로 더 독한 사람이었다. 신병 휴가 때는 본가인 지방으로 내려가서 학교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만나지 않았다 하며, 이후에도 굳이 학교 사람을 만날 일이 생기면 약속 장소가 학교 근처가 아닌, 다른 장소일 때만 참석했었다고 한다. 선배의 친구들이 장난 삼아 그녀에게 연락을 하려고 하면, 바로 자리를 피하기 일수여서 친구들 또한 언급을 안 하게 되었었다 한다. 다만, 그 선배가 술자리에서 그녀를 언급했던 건 단 한 번.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아직은 연락을 할 수가 없다.'라는 말 뿐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저렇게 까지 행동할 수 있을까, 문득 경외감마저 드는 것 같았다. 




 우리가 만난 지 약 200일이 되었을 무렵의 한 여름 어느 날. 두 통의 편지가 우리를 찾아왔다. 한 통은 밝았고, 한 통은 어두웠다.


- 주저함에 대하여 2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문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