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예린 - 0310
"제발 좀 끊어" 지수는 걱정 섞인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알겠어. 이것만 피우고 올게." 지우는 멋쩍게 웃으며 답변하고, 이내 밖으로 나갔다.
또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오늘만은 혼자이기 싫어서 억지로 시간을 내어 만난 지우이건만. 벌써 몇 개비 째인지 모르겠다. 술을 마신 게 잘못이었을까. 취했다 싶으니 더욱 자주 나가는 것만 같다. "망할 끽연가들. 왜 이렇게 이 족속들은 술만 마시면 담배를 마구 피워대는지 모르겠네." 지수는 혼잣말을 내뱉는다. 원래 주량이 세기도 하지만, 이렇게 원치 않는 쉬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다 보니 술이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취하질 않는다. 적당한 취기와 사랑이 필요해서 지우를 찾았건만. 지우는 지수에게 둘 다 주지 못하고 있었다. 넓디넓은 술집, 양철로 된 식탁과 화로 그리고 이제는 식어버린 불판. 이제는 미지근한 고기들. 맘대로 추가한 김치찌개. 방금 비어버린 소주 두병. 모두가 지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새로이 전달받은 소주를 열어, 지우의 잔에는 가득, 지수의 잔에는 적당히 따른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김지우." 지우는 지수의 두 번째 혼잣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문을 열고 자리로 다가온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슬쩍 미소 지으며 잔을 들고 '짠'을 청한다. 지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잔을 마주친다. 그리곤 지우가 잔을 비우는 광경을 유심히 쳐다본다. "야 적당히 꺾어 마셔." 뜬금없는 원샷에 놀란 지수가 말했다. "괜찮아, 너 기다리게 했으니까 벌잔으로 마신 거야. 잘했지?" 한쪽으로만 도드라지는 특유의 보조개를 자랑하며 지우가 웃으며 대답한다. "헛소리 하네." 지수가 대답하며 슬쩍 웃는다.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지만, 저 미소만은 당해낼 수가 없다. 지우와 지수 또한 언젠가 끝을 맞이하고, 그때부터 영원히 남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지우의 저 미소만은 영원할 것이라고 지수는 생각한다. 양쪽이 아닌, 한쪽으로 깊게 박힌 보조개. 그리고 그 덕분에 더욱 빛나는 미소를 가진 사람. 김지우의 미소. 김지우의 술버릇을 말이다.
지우는 때로 새벽녘에 침대에 앉아 혼자 피우는 담배 한 개비를 좋아했다. 잠든 지수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면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좋아하는 것들을 함께 할 때, 그 순간의 기쁨이 더욱 오래 지속되는 법이다. 지우에게는 담배와 지수가 그러했다. 최대한 지수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순간을 음미하곤 했다. 낮은 템포의 음악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거라 매번 생각하지만, 순간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매번 포기하곤 한다. 낮은 확률의 100%의 새벽보다는, 높은 확률의 80%의 새벽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지우와 지수 사이에서는 그렇게 많은 새벽들이 이어졌다. 지우는 담배를 다 피우고 나서 이내 침대로 돌아와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수의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지수가 잠들었을 때면,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워졌다. 검은색과 갈색이 오묘하게 섞인 눈동자가 밝게 빛나는, 큰 눈과 어울리는 긴 쌍꺼풀, 짙은 눈썹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 눈을 말이다. 그 사실이 유달리 안타까울 때면 지우는 슬쩍 지수의 눈 위에 입맞춤을 전하곤 했다. 완전히 깨길 바라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살짝 눈만 떠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잠버릇 덕분에 이내 좁아져버린 자리에 몸을 다시 뉘이는 것이 80%의 새벽의 마무리 절차였다.
지우는 때로(아니 자주)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었다. 키는 기껏해야 3cm 정도 더 클 뿐이라 팔에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것이 매번 보였지만, 굴하지 않고 지수의 머리 뒤쪽을 슬쩍 쓰다듬는 것을 유달리 좋아하곤 했다. 그러고 나서 지우는 빤히 지수의 눈동자를 바로 보며 미소 짓곤 했다. "너 나 많이 사랑하지?" 어느 날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지수가 말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노력할 거야. 하지만 만약 나중에 그렇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할 거야?" 지우가 순간 미소를 거두면서 물었다. 웃을 때는 너무나 선한 인상이지만, 미소가 사라진 지우의 모습은 때로 낯설고 차가워 보인다. 마치 남보다 못한 관계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표정으로 증명하고 싶다는 듯이. "담배보다 내가 널 먼저 죽일 거야." 이번에는 지수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그리고 이내 지우도 다시 보조개를 보이기 시작한다. 비로소, 서로의 웃음 외에는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 있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는 둘만이 가득하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것을 뒤바꿔 놓는다. 평범한 학생들이었던 지우와 지수는 어느새 '들'을 벗어나, '둘'로 나뉘게 된다. 한 사람은 평범하고 안정적인 곳에서, 한 사람은 평범하지 않고 불안한 곳에서 말이다. 그리고, 결코 다시는 '들'이 될 수 없음을 문득 깨닫는다. 그때부터 한 사람의 말은 다른 한 사람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일이 자주 생기게 된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이해하려 하지만, 이런 일은 너무나 진부하게 반복되곤 한다. 그리고 둘은 불가피성을 이해하면서도, 결국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날이 갈수록 차분해져 가고, 서로는 서로에게 사랑 표현을 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진다. 진심이 아닌 사랑 표현을 전달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은 그것이 같은 사랑 표현이든, 아니든 슬프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둘의 관계에서는 같은 사랑 표현으로 돌아올 것이 명확했기에, 둘은 '사랑해'라는 단어를 결코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미안, 하지만 진심으로 네가 괜찮았으면 좋겠어." 지우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문제없어. 나 괜찮을 거야." 지수가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지우는 두 번째 담배를 피우면서 지수를 차가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수는 예전처럼 이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길 간절히 바라보지만, 지우는 담배를 천천히 태워갈 뿐이다. 결코,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는 지수의 앞에선 담배를 피우는 일이 없었던 지우였기에. 이것이 마지막임을 비로소 짐작한다. 그의 두 번째 담배. 그의 낯선 문장들. 장난으로 결론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차가운 표정. 모두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지수는 지우가 너무나 밉지만,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갈게." 가방을 들고 의자를 뒤로 밀어 일어나면서 지우가 말한다. 카페에는 둘 밖에 없기에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매장 가득 울려 퍼진다. 지수는 고개를 들어 지우를 쳐다본다. "가." 간신히 울음을 참고 웃음을 지으면서, 인사를 전한다. 지우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간다.
그곳에는 지수와 지우의 재떨이만이 남아있다. 재떨이 속 담배는 완전히 타들어간 한 개비 그리고 끝부분만 살짝 타버린 한 개비뿐이다. 아니, 두 개와 담배와 지우의 낯선 말들이 카페 안에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