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1
그녀 손목에 있던 자국들
초등학교 4인방 친구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전학을 온 나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중고등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어서도 가까이 지냈다. 지금은 사는 곳이 멀어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다. 그녀는 그 마을의 토박이였다. 그녀는 친구들이 많았다. 자연스레 그 친구의 친구들이 내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4인방은 둘씩 짝을 지어 어디든 몰려다녔다. 그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초등학교 시절을 외톨이로 보냈을지도 모른다.
00역 지하철역에서 나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가죽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검은 곱슬머리에 오똑한 콧날, 하얀 피부가 햇살보다 눈부셨다. 나는 사람을 잘 보고 다니지 않는다. 어딜 가든 시선은 바닥에 두고 다녔던 이십 대였다. 계단에서 내려가는 방향에 그 남자가 있었기에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외모와 차림새다. 서울 외각의 지하철에서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거의 내려왔을 때, 위쪽에서는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였다. 그 남자 오른쪽에 여자가 있었다. 계단 오른쪽 담이라고 해야 하나. 그 담으로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남자가 밝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던 여자아이. 긴 머리를 보았다. 긴 머릿속에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내 초등학교 4인방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아이는 하나도 안 변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 아이에게는 많은 남자 녀석들이 맛있는 것과 편지를 주곤 했다. 사실 그 나이 때 사랑이 뭔지 알까? 뭔가 심각해하는 것도 신기했다. 누가 봐도 예쁜 아이였으니까. 사람 눈은 다 똑같나 보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옆에 있던 그 남자가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했다. 우리는 전철을 타고 이야기를 계속 나눴다. 처음에는 너무 반가웠는데, 막상 이야기를 하려니 어색했다. 어디부터 말을 해야 할지. 그 아이는 여전히 예뻤다. 슬픔이 찬 눈을 가졌다. 긴 속눈썹과 눈은 소설에서나 묘사되는 ‘사슴 눈’을 닮았다. 나는 실제로 사슴눈을 본 적은 없다. 소설 속 주인공 여자아이의 눈은 항상 사슴눈이었으니까. 아마도 비슷할 꺼라 생각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갑자기 그 아이는 소매를 걷어 자신의 손목을 나에게 보여줬다. 처음에는 뭔지 몰랐다. 손목에 일자로 볼록 튀어나온 자국들이 여러 개 있었다. 자해의 흔적이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표정을 짓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놀라는 얼굴을 하기에는 그 아이가 당황할 것 같았다. 아마 이 순간의 내 얼굴은 놀람과 당황으로 일그러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곳에서 나에게 그런 자국을 보여주는 그 아이가 원망스러웠다. 저의가 뭘까.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누가 지하철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에게서 이럴걸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내 심정과는 상관없다는 듯, 그 아이는 소매 속으로 그 자국들을 내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번 자살을 시도했는데 실패했다고. 나의 몸과 머리는 얼음이 되었다. ‘위로를 해야 하나. 자살이라고. 그걸 어떻게 위로를 해. 말도 안 된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 하나.’ 물어보기가 무서웠다. 그 아이는 먼 곳을 바라보다가 가끔씩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조심스레 왜 그랬냐고 물었다. ‘아하. 자살시도를 한 친구한테 왜 그랬냐고’가 뭔가.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장소에서였더라면 내 질문은 더 나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냥 많이 힘들었다고만 했다. 나는 그 친구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 그냥 울고도 싶었다. 화를 내고도 싶었다. 나는 지하철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청히 바라보기만 했다.하차할 역에 이르렀다. 허둥지둥 인 사치렛 말을 나누고 그렇게 우리 둘은 영원히 헤어졌다.
무엇이 그 아이를 힘들게 했을까?
어느 나이 때에도 힘들다.
힘든 때가 있다.
아니 매일이 힘들다.
자신을 없애는 일을 할 만큼,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타인이 뭘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