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딩이 답답해졌고, 코트가 더워졌다. 밤의 시간은 조금씩 줄고 그 자리를 낮의 시간이 침범해간다. 새까맣던 7시의 퇴근길에 미처 사라지지 못한 불그스름한 햇빛의 잔여물이 아스라이 남아있다. 목련이 먼저 터져 나오고 서서히 벚꽃도 얼굴을 내밀어 매일 조금씩 달라지는 산책길 풍경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감탄으로 채워진다. 겨울이 지났고 봄이 왔다. 지지난주, 겨울 이불을 세탁소에 맡겼다. 이불 커버를 깨끗하게 빨고 바싹 말려 얇은 속이불을 끼웠다. 봄이니까.
하지만 그것은 마음만 먼저 봄으로 향해버린, 몹시도 성질 급한 사람의 섣부른 선택이었나. 환절기의 일교차는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지. 낮이 더워도 밤은 아직 쌀랑한데. 얇은 이불을 덮기엔 조금 일렀나. 잠자리가 약간 서늘하게 느껴진다. 전기장판을 다시 꺼내야 하나. 몸을 웅크린다. 이불속에 몸을 포옥 집어넣는다. 얼굴만 빼꼼. 1mm의 피부도 삐져나오지 않도록. 마치 뱃속 아기처럼. 갑자기 잊고 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정말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 팔모가지를 확 쥐어잡고는 과거로 데려가버린 그 말. ‘웅숭그리다’
“너 맨날 그렇게 웅숭그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맞아. 그 말. 내 이불을 등까지 올려주며 항상 했던 그 말. ‘웅숭그리다’, 춥거나 두려워 몸을 궁상맞게 몹시 웅그리다 라는 뜻의 말. 내 기억에 엄마는 ‘웅숭그리다’가 아니라 ‘웅숭거리다’라고 발음했던 거 같지만. 나는 이 말을 엄마에게서만 들었던 거 같다. 보통은 웅크리다 라고들 하니까. 눈을 감고 가만히 기억을 끄집어내 본다. 그런데 이 말을 어떤 목소리로 말했더라. 어떤 말투로 말했더라. 기억이 잘 안 나. 속이 상한다. 목소리도 말투도 이젠 흐릿하게 떠오를 뿐이지만, 그래도 이 말을 하면서 내 등이 다 덮이도록 이불을 올려주던 손길은 생각나. 아직 잊지 않았어.
난 정말, 내가 이불을 잘 덮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불을 못 덮을 건 또 뭐람. 그냥 덮으면 되는 걸. 하지만 나의 이불 덮는 방식이 어딘가 잘못됐는지 옆으로 누워 잠드는 나는 항상 앞만 이불로 폭 싸매고 등이 드러나게 이불을 덮고 있었고 언제나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하면 얼른 이불을 등까지 올려줬다. “아, 왜 그래~” 투정 섞인 말투로 찡얼대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너 웅숭거리고(웅숭그리고) 있으니까 그렇지!” 나 웅크리고 있었나? 웅크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춥다고 생각 안 했던 거 같은데. 그래도 엄마가 그렇게 이불 올려덮어주면 더 따뜻해졌던 건 확실했다.
자취를 시작하고 혼자 잠들면서 확실하게 알게 됐다. 종종 내 등에 이불이 덮여 있지 않다는 걸. 아, 진짜네. 엄마가 이불 고쳐 덮어줄 만했네. 이젠 의식적으로 이불을 더 포옥 덮는다. 밤이 추우면 추울수록.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것. 추우면 나는 몸을 웅크리고, 웅숭그리고 잔다.
혼자 잠드는 게 더 춥네, 외롭네 이런 건 아니다. 잠자리에 예민한 데다 잠귀도 밝은 편이고 장소만 바뀌어도 한참을 뒤척여야 하고 옆에 누가 누워 있으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퇴근 후 저녁 먹고 운동하고 샤워까지 한 뒤에 포근한 이부자리에 드러눕는 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간 중 하나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잠자리에 가만히 누워 뒹굴뒹굴 느긋함과 편안함을 만끽하다 잠에 빠지는 게 얼마나 꿀 같은지. 그런데, 그냥. 그냥 생각이 조금 난 거다. 몸을 작게 말고 잠드는 딸 찬바람 들어 추울까 신경 써주던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게. 잠들기 전에 서로 내가 더더더 사랑한다고 좋은 꿈 꾸라고 행복하고 따스한 말 주고받던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게. 웅숭그리고 잠들다 눈이 떠진 새벽에 그냥 생각이 조금 난 거다. 좀 춥네. 그래도 곧 따뜻해지겠지, 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