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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Dec 21. 2023

라이프 분야 전문가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주일. 영국 내 직장 분위기는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들 휴가를 간 까닭에 메일도 오지 않고 말 그대로 한산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막판에 문제가 터졌는데 담당자들이 죄다 휴가 가고 없거나 당장 휴가 갈 예정이라 그 뒤처리를 하느라 죽어나거나.


안타깝게도 이번 주 내 운세는 두 번째 시나리오로 기울고 있었다. 저번주 금요일 오후 4시부터 메일이며 Teams 알람이 뜰 때부터 망조가 끼었다고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주말이 지나고 나자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어떤 기분이냐면 감당 못할 음식을 눈앞에 쌓아두고 누가 타이머를 켠 뒤 '가능한 많은 음식을 드십시오. 다 못 먹으면 남은 음식양만큼 벌금'이라고 나를 쪼아대는 기분이다.   


그렇게 꾸역꾸역 월요일과 화요일을 먹어치우고, 부은 얼굴로 수요일 아침을 시작했는데 휴대폰에 브런치 로고가 뜬 알람이 와있었다. 보통 자주 보는 브런치 알람은 나더러 글 좀 쓰라고 재촉하는 내용일 때가 많아서, 혹시 저번에 글을 쓴 뒤 벌써 그만큼 시간이 지났나, 하고 조심스레 열어봤는데 '스토리 크리에이터'에 선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오오!' 하고 설레는 마음에 일단 꼼꼼히 이게 뭔지에 대한 설명을 읽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도대체 내가 쓰는 글에 어떤 확고한 주제가 있긴 했나? 대충 영국, 직장 생활, 해외 생활, 그 외 잡다한 이야기 따위를 속으로 분류하고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잡탕 요리에 가깝지 않나?


그런 내게 이 브런치는 내가 도대체 어떤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전문성, 영향력, 활동성, 공신력'있는 '창작 분야'를 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렸을까.


그러고 나서 내 브런치 페이지로 들어가 보니 '라이프 분야 크리에이터'라는 배지가 달려있었다.


순간 보고 잠시 할 말을 잊었다가 혼자 웃고 말았다. 꽤 반어법 같이 느껴져서 말이다.


나는 삶에 대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고, 일상의 소소한 행복에 대한 글도 거의 쓰지 않는다.

맞벌이하면서 아이들 키우는 부모들이 그렇듯 우리의 매일은 전쟁 같고, 빽빽한 스케줄로 맞물려 돌아간다.

영국에 사는 게 무색하게 딱히 work life balance가 좋다는 생각도 하진 않는다.

휴가를 떠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가도 막상 휴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면 벌써부터 그 휴가 갈 생각에 피곤해지는 피로한 중년이다.

남들 보기에는 남부럽지 않은 직장, 직위, 연봉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아직도 삶에서 이룬 게 없는 것만 같아 초조해지곤 한다.


이런 엉망진창인 내가 속에서 자기들끼리 엉키고 꼬이다 못해 터져 나오는 단어들을 주워다가 글을 쓰는 공간이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죄송하게도) 바로 이곳이다.


그런 내게 '라이프 분야 크리에이터'라니.

하긴 굳이 이름을 붙이라 한다면 내 잡탕 같은 글에 붙이기 가장 무난한 분류일 지도 모른다. 삶이 무조건 희망차고 밝고 긍정적이란 법은 없으니까. 엉망진창일지라도 삶이긴 삶이니까.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했더니 쿨하게 답했다.

"Write it in your CV. 'Specialised in Life'"


그리고 둘 다 같이 낄낄대며 웃었다.

그 말이 나와 연결되었을 때 주는 그 괴리감이 우스워서.




생각이 많아져서 글을 쓰긴 했지만, 결국은 이러나저러나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잡탕 같은 글이라도 이렇게 읽어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말이죠.

딱히 삶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나 도움이 들어있을 것 같지 않은 글들이긴 해도, 뭐 영양소가 별로 없어도 가끔씩 씹게 되는 껌 같은 존재라도 된다면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이걸, 제발 글이나 좀 자주 써라,라고 던져주는 당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니면 이제라도 삶에 대한 고찰을 좀 해봐라, 하는 무언의 압박일 수도 있겠죠.


연말이라는 시기에 맞춰 참 적당한 타이밍입니다. 안 그래도 저란 인간은 매년 한 해의 목표를 정하는데 진심인 사람이니까요. (그걸 지키는데 진심이라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라도 좀 자주 글 쓸 계획을 세우긴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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