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억 대의 계약을 진행 중이다.
벌써 몇 번의 계약서 초고가 왔다 갔으며 얼마나 많은 숫자를 보고 재계산하는지 모르겠다.
상대방 회사의 담당자인 I 역시 나와 비슷한 상황이다.
우리는 벌써 몇 주째 서로를 향해 'Quick call?'이라는 메일을 보내며 미팅을 잡고 통화를 했고, 그러던 저번주였다.
어김없이 Teams 미팅에 접속해서 웃으며 안부를 나누는 상황.
으레 하던 인사말과 이 지랄 맞은 스트레스 과다의 현 상황에 대해 농담하며 웃고.
그러던 중 I가 지나가듯 말했다.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무슨 검사냐고 물으니 당뇨가 의심된다고 했다.
요즘 무척 피곤하고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당뇨병인 거 같다고 했다고.
예전 직장 동료도 당뇨로 고생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더 했는데, 그 때문인지 I가 사정을 조금 더 털어놓았다.
"I've also asked for some mental health support at work"
그 말에 괜찮으냐고 물으니, 요즘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그랬다고 답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꾸만 머릿속에 숫자가 맴돌거나, 혹시 뭘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과 강박감이 들어서 그렇다고.
자기 속을 제대로 털어놓는 것과 그 이후의 반응을 어색해하는 대부분의 영국인이 그렇듯 그 역시 그렇게 말해놓고 역시나 웃으며 넘어가려 했다.
"So if I forget something, please let me know." (그러니까 내가 뭔가 잊은 게 있다면 말해줘)
물론 이렇게 상대방이 웃으며 넘어가려는데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 영국의 정서에 어긋나는지라, 나는 바로 그에게 '어, 네가 나한테 커피랑 근사한 식사를 대접한다고 한 걸 잊은 것 같아',라고 대꾸했다.
그는 '오, 그래, 또 뭐가 있었지?' 하고 맞받아치고, 그렇게 우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 웃어대다가 비즈니스로 돌아왔다.
적당한 웃음기를 얼굴에 두르고 있지만, 비즈니스 모드로 돌아간 우리는 당연히 서로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거절과 타협의 말을 주고받는다. 이제 마무리 단계지만 우린 아직도 몇 가지의 사안을 두고 대치 중이고 각자의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다.
그러다가 더 이상 회의의 진전이 없을 때 우리는 다시 웃으며 서로를 마주한다.
그럼 다음에 보자.
이번에는 그 말 대신 그의 검사 결과에 아무 이상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해주고, 그때만큼은 협상 자리에 나온 상대방이 아니라 같은 입장에 있는 직장인으로서 그의 안부를 진심으로 바라줬다.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우리는 그저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감정이 소모되면 안 되는데 쉽지 않다고 또 속마음을 조금 털어놨다.
물론 우리는 진짜 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그 뒤에도 서로 농담 따먹기나 하다가 미팅 종료 버튼을 누르고 나왔다.
한숨이 길게 나왔다.
계속 얼굴에 잔형처럼 남아있던 웃음기가 걷히고 피곤해졌다.
I가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I는 이제껏 봐온 비즈니스 파트너들 중에서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솔직히 웬만한 자리에 올랐다는 사람들 중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는데 (특히 세일즈), I와는 이 폭풍우 몰아치는 계약의 파도 위에서도 여전히 점잖고 유쾌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서면상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그가 속내를 드러낸 것도 조금 놀라웠지만, 그럴 정도면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긴 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그가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그것도 나름 자존심 상하겠지만.
여러 개의 계약건이 한 번에 몰리는 바람에 몇 달 동안 정신이 없었다.
어떤 회의에서는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런 moron' 하며 이를 간 적도 있고, 어떤 회의에서는 당연히 안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걸 상대방이 아직 알아서는 안 되는 타이밍이라 적당히 혀만 구슬리기도 했다.
카드 게임이야 심장을 쫄깃하게 하지만, 돈이 걸리면 유희로 즐길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에너지를 다 쏟아붓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현실은 보스몹 잡았다고 레벨업 되면서 체력바가 충전되는 게임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러니 늘 그 프로젝트가 아니라도 다른 일과 일 외의 것들에 소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유지해둬야 한다. 안 그러면 방전되는 건 순식간이니까.
그래서 일과 감정을 분리하는 게 필요하다.
프로젝트는 프로젝트, 나는 나.
인간적으로 I라는 사람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의 회사가 내미는 제안서를 좋아하는 걸 별개의 문제.
비슷하게 누군가와의 협상은 정말 지루하고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누군가의 잘난 척과 오만함은 귀에 총 맞는 것 같은 고통을 선사하지만, 어차피 일의 연장이니 상관없다.
내가 그들의 친구나 가족인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보고서와 같다고 생각하면 그만.
물론 나 역시 상대방에게 그렇게 인식되길 바라고 있다.
누군가에게 내가 내미는 제안서나 협상서는 꽤 불쾌한 경험이 되기도 할 테니까.
영어로 'don't shoot the messenger'라는 말이 있는데, 협상 자리에서 꽤 많이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서로의 대화가 과열되면 한걸음 물러나서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I'm just a messenger'라고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니까 (설사 그 메신저가 메시지를 직접 작성한 본인이라 할지라도).
그렇다고 할지라도 메신저가 무례하거나 재수 없으면, 그건 그것 자체로 문제가 되겠지만 말이다. (협상 자리에서는 메신저의 태도도 당연히 협상 카드가 된다).
이건 I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하지 못한 말이고, 나 스스로에게 다시 하는 말이며, 누군가에게 돈을 받는 대가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동료 직장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일 뿐이니 굳이 스스로와 동기화를 시킬 필요는 없다고.
회사에서 얻어가야 하는 건 경험치와 능력 향상, 그리고 돈!
그 외의 것에는 반사를 외쳐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