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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솔아 Jul 23. 2020

감정도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첫 상담이 끝나고 나는 한결 나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지만 가만히 참고 있는 내 모습보다 터트려 우는 내 모습이 더 건강해 보였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안고 출근했는데 현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아서 약간 좌절했다.

그래도 절망스러운 환경에 전처럼 죽은 듯 동화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둘러싼 현실이 참으로 부조리했구나' 깨달았다. 깨달음은 현실에서 버틸 힘을 줌과 동시에 현실에 갇힌 느낌도 었다. 적당히 안정적이고 딱 참을 수 있을 만큼 답답한 일주일을 보냈다.

첫 번째 상담이 정말 좋아서 다음 상담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막상 당일이 되니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내가 다 괜찮아져서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굉장히 유혹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상담을 받기로 했을 때 상담 선생님이 제시한 유의사항에 ‘마음대로 상담을 끝내지 않고, 끝내는 과정 또한 상담가와 함께 해야 한다.’가 왜 있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


이번 상담은 내 회사 생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루었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얘기했고, 내게 있어 객관은 내 사감을 최대한 배제하는 거였다.

나는 회사에서 두 사람 사이에 낀 새우였다. 상사와 프로젝트 리더가 싸웠고, 상사는 프로젝트 구성원한테 리더의 업무와 권한을 넘겼다. 프로젝트를 끌어가던 리더는 상사와 싸웠다는 이유로 본인보다 훨씬 어린 나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프로젝트 리더의 감정을 추측해 보았다.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 것이며 상실감과 수치스러움, 막막함도 함께 느끼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업무 대리를 맡은 나에게 그 사람이 비협조적으로 나와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상황으로 보자면 나보다 그 사람이 더 안 좋은 게 분명했고, 나도 그 사람의 입장이었으면 자포자기했을 것 같아서였다.

“OO씨는 어떤 생각이 들어요?”

나는 이런 상황을 만든 상사를 비난했다.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사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다고. 상사와 싸운 리더에 대해서는 나쁜 소리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 때문에 힘든 건 이해한다. 다만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아서 힘들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그 사람에 대한 질문을 몇 가지 더했다. 그때마다 나는 똑같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비협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알겠지만, 이해와는 별개로 힘이 든다고.

“아니, 이해하는 거 말고요. OO씨가 그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은 어떤데요?”

나는 말문이 탁 막혔다. 나는 ‘힘들다’는 감정을 이미 말했는데 선생님은 나한테 대체 무슨 답을 원하는 걸까?
나는 주절주절 딴소리를 했다. 선생님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더 말해보라는 듯이.

“...억울하고 나를 도와주지 않는 그 사람이 원망스러워요.”

마침내 내 '진짜 감정' 나왔을 때 선생님은 “그렇죠”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히고 마음속이 무겁게 짓눌리던 이유가 내가 그 사람을 원망하고 있어서 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힘든 건 그 사람 때문이다.’라는 탓도 감히 할 수 없어서 나조차도 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 또한.

내가 경계했던 건 그로 인해 힘든 내가 지극히 주관적이고 피해 의식으로 똘똘 뭉친 발언을 내뱉는 거였다. 남 탓을 하는 건 ‘옳지 않았다’. 나는 상황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바라보아야 했고, 상황의 피해자로 보이는 사람을 대변해야만 했다. 나보다 더 크게 피해를 본 사람이 있으니 나의 억울함과 원망 같은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OO씨의 말을 들어보니 판단의 기준이 ‘옳다/그르다’에 치중되어있는 거 같아요. 근데 세상은 옳고 그름으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뭐로 판단을 하나요?”

“ 내 감정으로도 판단할 수 있죠.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좋은지 싫은지. 불쾌한지 원망스러운지 등등”

나는 돌연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느꼈다.

나의 감정.

내가 가장 먼저 버렸던 것.

선생님은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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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나의 ‘감정’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도 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여태껏 내가 인지할 수 없었던 어떤 ‘선’을 넘어갔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지 말아라.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고 쉽게 불평하지 말아라.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말고 신의를 지켜라.
남 탓하지 말고 변명하지 말아라.
정의로운 사람이 돼라.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
...


그동안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행동 양식들이 나의 온전한 생각과 의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의 ‘옳음’은 ‘사회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의 집합체였고, 내 감정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사고 체계였다.

불안, 원망, 분노, 불평, 증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 ‘옳지 않은’ 감정이었기에 없는 듯 외면했다.

긴 시간이 지나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자를 원망하기는커녕 그에게 무슨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피 흘리는 내 마음은 모르는 척하고 다른 사람을 변호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감정을 죽여왔을까?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


내가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내 감정보다 사회적 ‘옮음’을 우선하지 않았을 텐데.

어느 멍청이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도덕적인 ‘옮음’을 추구한단 말이야?

습관적인 자학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내가 여태껏 소신 있고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논리적으로 말을 잘한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알아 왔던 나와 상담에서 발견한 내가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다.

감정적으로 이렇게 미숙해서야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지?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 걸까?

선생님은 내 생각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자기감정을 잘 살피지 못하고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감정을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성과 논리,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고. 감정을 다루는 게 미숙하면 앞으로 해나가면 되는 거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안도함과 동시에 지속적인 상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잘잘못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감정을 다루는 미숙함이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점에서 가장 크게 안도했기 때문이다.

내 생각의 길은 이미 ‘옳고/그르다’ 혹은 ‘잘못이다/아니다’에 맞춰있기 때문에 ‘옮고/그름의 관점 말고 네 감정은 어떤데?’라는 질문을 던져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센터에 들어오기 전 ‘상담을 받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라고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한동안은 계속 상담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옳고 그름을 떠나 내 감정으로 판단하는 순간이 오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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