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질병, 나의 질병
내게는 익숙하지만, 타인에게는 낯선 질병에 대해서
얼마 전 회사 동료가 메니에르 병으로 고생했다. 처음 들었을 때 "메...무슨 병이요?"라고 되물었을 만큼 낯선 병명이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되물어 보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닌 듯 익숙하게 메니에르 병을 설명했다. 병에 대해 듣고 보니 생각보다 가벼운 병이 아니라서 "어머, 어떡해요... 언제부터 아픈 거예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언제부터 아팠냐, 원인이 뭐냐, 어떻게 하면 낫냐 등등.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자세하게 캐물었고, 그 사람은 그냥 덤덤히 대답해주었다.
자리에 돌아와서 일을 하려는 데 문득 '우리가 뭐라고 그 사람에게 그런 오지랖을 부렸을까?' 싶었다.
우리들의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모습에 '이 사람에게 메니에르 병은 이미 너무나 익숙한 병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타인에게는 너무나 생소하고 낯설지만, 본인에게는 이미 익숙해진 병.
뒤돌아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흔한 상황이었다.
다시 한번, 그게 뭐가 특별하다고 그렇게 유난을 떨었을까?
...
새삼 나의 몸을 돌아보았다. 내가 갖고 있는 익숙한 병이 뭐가 있지? 하고.
4년 전에 진단받은 목디스크가 있다. 나이 스물다섯 살에 아무 전조 증상 없이 갑작스레 터진 목 디스크. 타지 생활 중이었어서 엄마한테 전화로 "나 디스크래..." 말하 다가 엉엉 운 기억이 난다. "디스크는 평생 질환이라는데 나 어떡해 엄마..나 망했어.."하고.
4년이 지난 지금은 "아, 저 목디스크 있어요." 하고 그냥 말한다. 처음에는 타인의 질병처럼 낯설었지만 이제는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졌다.
나는 여성이라서 걸리는 질병도 가지고 있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인데 월경 불순이 심해서 병원에 갔다가 알게 됐다. 너무 오래전부터 겪은 월경불순이라 이제는 위기의식도 잘 느끼지 못하는데, 주위 사람들 한테 말하면 진심으로 걱정해주면서 병원에 꼭 가보라고 말해준다. 그때마다 이 증상이 내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주위에 말했을 때 그 어떤 질병보다 더 큰 걱정을 받는 질병도 있는데 병명은 섬유 선종(혹은 섬유 근종)으로 가슴에 생긴 원인불명의 혹을 말한다. 서른이 채 못됐는데 벌써 두 번 제거 수술을 했고, 몇 개의 혹은 계속 추적 검사를 하고 있다. '혹' 하면 '암'이 연상돼서 나도 이 질병은 타 질병과 달리 좀 걱정하는 편인데 타인이 느끼는 걱정스러움과는 시작점이 약간 다르다. 타인에게 이 질병은 '혹이 있다'는 사실부터 이미 큰 질병이지만, 내게 '혹이 있다'는 건 억울하긴 해도 걱정스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걱정을 시작하는 지점은 의사 선생님이 초음파 검사 후 조직검사를 제안할 때부터다. (뭐지? 왜 조직검사하자고 하지? 모양이 안 좋나? 혹시 암 인가?!!!)
이밖에도 척추 측만, 약한 손목 관절, 두통, 디스크로 인한 신경통, 비염 등등 정도에 상관없이 다양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
...
타인의 시선으로 내가 지닌 병을 죽 훑어보니 내게는 익숙한데 타인에게는 낯선 질병이 꽤 있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밥도 잘 먹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내 기준 심각한 병에 걸린 적도 없기 때문이다.
질병은 생각보다 주관적이다. 내게는 익숙한 질병이 누구에게는 생소하고, 내게는 생소한 질병이 상대에게는 너무나 익숙할 수 있다.
걱정 또한 주관적이라 한 끗 차이로 오지랖이 되는 게 다반사다. 친척 어르신 분들이 결혼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제 딴에는 걱정이지 않나.
질병과 걱정 모두 주관적인데, 타인의 질병을 내 마음대로 재단해서 걱정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상대에게 이미 익숙한 질병에 유난을 떨 수도 있고, 나한테 익숙한 질병이라 별거 아닌 취급을 했다가 타인의 고통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무례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타인의 질병을 객관적으로 대하는 건 너무 정 없다. "나 어디가 아파."라고 했을 때 내 병을 대하듯이 "그래?"라고만 대답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질병과 걱정이 주관적이라면 상대의 주관성을 살리는 방향으로 대응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질병'은 익숙하게, '걱정'은 상대가 느꼈을 걱정만큼만.
누군가가 디스크 걸린 적 있다고 말한다면, 병 자체에 관심을 두기보다 그 사람의 경험에 중심을 둬보는 거다.
"그래?(병 자체는 익숙하게 대하고) 되게 고생했겠다.(상대가 겪은 경험에 중심을 둔다.)"
상대방은 자기가 허용할 수 있는 만큼의 내용을 말하지 않을까?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 병에 걸렸고, 원인이 무엇이고, 낫는 방법이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을 거다.
나의 질병에 대해 타인이 이렇게 물어본다면?
아마 말하기 좋아하는 나는 신나서 내 병에 대해 줄줄 늘어놓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