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인장맨션 Apr 20. 2022

배움의 감각

감각의 조각집 - 02

 

배움의 감각 - 모든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저 건물이 저렇게 생겼었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용하는 버스 정류장에서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광역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맞은편 건물에 오랫동안 시선을 두었습니다. 10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는데, 요즘 지어지는 구조물과는 다른 느낌이었어요. 비상구 계단이 밖으로 나와 있어, 건물 자체가 마치 사다리를 옆구리에 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간신히 내려갈 것 같은 그 계단은 2층에서 끊겨있었어요. 혹여나 저 건물에 불이 나거나,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2층까지 내려갔다가 뛰어야 하나? 왜 2층까지 만든 거지? 이왕 만들 거면 한 층 더 만들 수 있지 않나. 건물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가 궁금해졌습니다. 몇 년 간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건물인데, 그날따라 세세하게 뜯어보았습니다. 지붕의 모양, 외벽의 질감, 창문의 위치 등등. 무엇 하나도 ‘그냥’ 만들지 않았겠죠. 건축 문외한인 저는 설계의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냥 만들진 않았을 거라 짐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버스정류장에 오기 전에 저 또한 건물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 건물이 아니라 3d를 통해 만들었지만요. 


    얼마 전부터 3D 아트를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모르는 수많은 영역 중 '미술'은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집니다. 미술의 영역은 재능 있는 사람의 전유물로 느껴진달까요. 그런데 시각적인 감각을 더 해 공간감을 필요로 하는 3D를 배우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못 해도 되니까요. 3D 아트를 통해 특정한 것을 이룰 마음도 없고, 잘 해내야겠다는 오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도 수월했고 배우는 과정도 꽤 즐겁습니다. 부담이 없지만 배움을 게을리 하진 않습니다. 이날은 3D 프로그램을 통해 나만의 건물을 만드는 수업에 참여했는데, 막상 건물을 설계하려니 쉽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파트에서 살아본 저는 모든 건물을 세로가 긴 직사각형 형태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만의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니. 세로가 긴 직사각형은 아닌 게 확실했습니다. 그러면 전 어떤 건물에 살고 싶을까요. 프로그램 속 정육면체를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건물의 형태에 대한 호기심은 버스를 타서도 계속되었어요. 지나갈 때마다 보이는 건물들의 설계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요즘 건물들은 왜 지붕을 뾰족하게 만들지 않을까. 저 건물은 가운데를 왜 뚫어놓았을까. 버스가 건물들을 지나치는 속도에 맞춰 저의 궁금증 또한 단상에 머무를 뿐 해결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버스에서 보낸 시간은 꽤 즐거웠습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죠. 제가 배운 건 3d 아트 기술일 뿐인데 존재하는 것들의 개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의 시선은 물건 끝에 닿습니다. 3d 아트를 가르쳐주는 선생님께서 물건들의 테두리에는 미세한 곡선이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이후 책상, 의자, 냉장고, 문 등등 정육면체를 기반으로 한 물체들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대부분의 물건은 미세한 곡선을 지니고 있어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도 노트북, 핸드폰, 키보드 등의 테두리를 살펴보세요. 미세한 곡선을 지니고 있습니다. 낯선 것을 배우니 생각지도 못했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이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게 시선을 내어줍니다. 그러려니 넘어갔던 모든 것들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 이 감각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늦었다는 감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