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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May 16. 2022

아시럽에서 쓰는 명상록 119

(은숙이는 내 모든 그리움의 대명사이다.

         117 (은숙이는 내 모든 그리움의 대명사이다.)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여운은 절절하다. 아시럽 대륙을 달리면서 더 곡선의 시간, 더 많은 공간,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모든 욕심을 다 채울 수가 없었다. 삶은 언제나 선택과 집중을 강요한다. 아시럽 대륙을 온전하게 나의 두 다리의 근육에 의존해서 완주하는 일에 더 집중하다 보니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이 못내 아쉽기만하다.     


 베이징에서 오랜만에 휴식도 취하고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도 가지고 친구도 만나 즐거운 시간도 보냈지만 베이징의 그 유명한 볼거리들을 둘러보지 못했다. 지금 내게 구경하는 시간보다 더 절실한 것은 휴식의 시간이다. 또 하나의 가지 않은 길을 여운으로 남긴다. 작년 9월 1일 헤이그에서 출발할 때도 형성이와 은수가 부부동반으로 찾아와 자칫 초라하고 쓸쓸했을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번에는 경환이까지 같이 와 먼 길 달려온 발걸음을 위로해주니 그 기쁨이 몇 곱절 크다.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달리지만 아시럽 대륙을 달리는 길에는 일찍이 공자가 설파한 군자(君子)된 자의 삼락(三樂)을 즐기는 시간이기도 하니 딱히 아쉬울 것도 없다. 어차피 인생은 매순간 선택과 집중을 강요당하니 말이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은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 학이시습지불역열호)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않은가?(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  

   

 달리면서 나는 많은 공부를 했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알차게 산 공부를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지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궁금했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여 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나 문학, 음악과 미술을 공부했다.


 내가 지나는 곳의 지리와 내가 본 바위가 사암인지 현무암인지 화강암인지, 내가 보았던 예쁜 꽃의 이름이 무엇인지, 숲을 지날 때 노래를 부르던 새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는지, 어떤 음식을 먹는지, 무엇을 하며 여가를 즐기는지 궁금해서 공부했다.

 그렇게 알차게 배운 것을 또 달리면서 익히는 시간까지 가지니 이 아니 기쁨이겠는가? 먼 곳에서 나를 찾아 응원해주러 사람들이 오고, 특히 어렸을 때 친구들이 찾아주니 또한 기쁘지 않은가? 그리고 어제 KBS 베이징 특파원과 이곳의 요녕신문, 서울신문 한겨레신문에 내 기사가 나갔어도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아직 국내외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성낼 일도 아니니 내가 과연 군자답지 아니한가?     


 같은 무렵 첫사랑에 가슴을 졸여했고, 그 무렵 술도 배우고 담배도 몰래 피웠다. 아마 그 무렵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 아련히, 눈부시게 빛나는 무언가를 함께 바라보며, 저 깊은 곳에서 일어나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는 혼돈과 같은 방황을 함께 했었다. 촌스럽게 심장이 두근거려 누가 알아챌까 두려웠던 것들을 우리는 서로 알아채고 놀려먹기도 했었다. 두근거리던 시절 두근거리던 심장을 공유한 친구들이다.

 어마어마하게 생생하며 환상적인 폭풍의 언덕에서 그 거센 감정의 폭풍을 함께 마주 서서 맞았던 친구들이다. 그때 10년 후, 20년 후를 꿈꾸고 또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40여 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선연해지는 추억이 있다. 잊으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 있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면 속 깊은 곳에서 바람이 일어 옛일이 흔들리는 촛불 앞에 오래된 일기장처럼 아스라이 떠오른다. 그 시절 나는 찌질하고 약해서 내가 은숙이를 그렇게나 사무치게 좋아했던 것도 은숙이 본인은 물로, 친구들에게조차 금지된 사랑을 한 양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얼마 전에야 고백할 수 있었다.


 은숙이는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지 40년 158일이 지난 지금껏 나의 모든 그리움의 대명사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그 대명사를 밖으로 표현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리움’이라는 단어를 유독 즐겨 사용하니 그 단어가 은숙이를 표현하는 대명사인 셈이었다. 세월이 가져다주는 기억의 카오스 속에서 그리움이 은숙이가 되었다가, 은숙이가 그리움이 되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녀에게 나는 한 번도 내 마음을 전해본 적이 없었다. 첫 휴가를 나오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1년 전 아시럽 대륙에 거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뛰어든 용기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차가운 목소리의 냉기는 내 심장 깊숙이 뚫고 들어와 가뜩이나 여린 내 심장을 여지없이 꽁꽁 얼려버리고야 말았다. 더 긴 말은 오고 가지 않았다. 약속 장소만 정해졌을 뿐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믿기지 않고 어처구니없는 좌절을 안겨준 40년 159일 전 그 날 나는 내 친구와 함께 종로 2가의 음악다방으로 나갔다. 그녀는 미리 친구들과 나와서 앉아 있다가 내가 자리에 앉자 내게로 다가와 편지만 달랑 한 장 내밀고 사라졌다. 그날이 그녀가 내 인생의 무대에서 짧고 슬픈 단역배우의 역할을 마치고 영원히 퇴장해버린 날이다. 나는 두려워서 그 편지를 열어보지 못했다.

 정황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데 구차하게 편지를 읽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때 친구 앞에서라도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성냥을 그어서 편지의 끝부분에 대었고 알 수 없는 언어는 태워졌다. 그 후 나는 오래도록 그 편지의 내용이 문득문득 궁금했다. 내가 태워버린 그 편지는 내 가슴에서 타지 않고 그리움으로 남아 내 기분에 따라 다른 내용으로 읽혀지곤 했다.


 그 편지는 태워져서 영물이 되어 힘들고 고단할 때 용기를 주는 격려의 글이기도 했고, 때론 내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폭력이 되기도 했다. 친구들 사이에도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궁금한 것들이 있다. 그때는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었던 것들도 세월이 흐른 후에는 그런 부끄러운 것들과도 정답게 마주 앉아 가슴을 데워주는 와인 한 잔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성냥을 그어 댄 것은 편지뿐만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의 끝자락에도 성냥을 그었다. 나의 여린 심장은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나에게 깊은 좌절을 안겨주었던 ‘은숙’이를 평생 호리병에 담아 내 마음속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어 두고 스스로도 옴짝달싹 못 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아시럽으로 출발하기 전 우연한 기회에 용기를 내어 친구들에게 고백했었다. 세월이 내게 그런 용기를 가져다주었나 보다. 이제 아시럽을 거의 다 오면서 강인해진 내 심장은 이제 실명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움을 호리병에서 꺼낸 순간, 나 자신이 호리병에서 나온 순간 그리움은 희망이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무게와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듯이 나는 그때 자아의 무게를 감당할 능력도 외부 사회의 무게와 맞설 의지도 없었다. 연약하고 초라한 나의 첫사랑은 잊히기는커녕 내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화학작용을 하면서 변신을 거듭했다.     

 내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은영이였고, 또 다른 글에서는 그냥 그녀이었다. 이젠 오랜 세월이 흘렀고, 세월 속에 ‘은숙’이는 모든 그리움의 대명사가 되었고, 나의 젊은 날은 달빛에 물든 전설이 되었다. 추억은 책갈피 속에 끼워둔 은행잎처럼 세월을 덧입어 더 깊고 은은한 색이 되어간다. 그리고 추억은 군대의 사열식에서 오랜 경직된 차려 자세 뒤에 “편히 쉬어!” 명령과 같이 마음에 휴식을 주었다.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가 나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만났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때 나는 좌절했지만 젊음의 한가운데 서 있었고, 짝사랑이라 비웃어도 좋지만 사랑의 열정에 휩싸였었다. 누구나 앓는 젊음을 앓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누구보다도 소심하고 찌질했지만 나는 순수한 열정을 고이 간직했었다. 그때는 이런 나의 감정은 세계적인 호응을 얻을 줄 몰라서 나는 속으로 속으로 움츠러들었었다.     


 그런데 방탄소년단이라는 젊은이들이 이런 나의 감정을 잘 표현하여 세계적 스타 반열에 올랐다. “I need you girl.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해.” 장만옥 양조위 주연 영화 ‘화양연화’의 시작 자막은 이러했다.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 버렸다.”      

 내가 편지를 태워버린 것은 옳았다. 태워 없애고 약간의 모호성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내 자존심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고 희망으로 자라났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그 일로 세상 구석구석 아름다운 곳뿐만 아니라 지저분한 곳 위험한 곳 다 지나왔다. 젊은 시절 거의 모든 시간을 그녀를 그리워하면서도 어떻게 다가갈지 모르며 애만 태우고 좌절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간절하기에 그것을 품고 살면서 내공이 쌓였다.


 돌이켜보면 내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밤하늘을 본 곳은 사막이었다. 낮에 그리도 황량한 사막은 밤에 찬란한 별빛 쇼를 연출하여 보상해주었다. 사막보다 황량한 짝사랑을 하던 그때 사막의 밤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우주적 그리움을 키웠다. 절망의 원천이었으나 삶의 영감으로 승화된 그 힘으로 이 길고 험한 여정에 나는 한 번도 지루해하거나, 두려움이나 불안에 떨지 않았다.     


 이젠 그 그리움이 은숙이였다가 조국의 자주 평화통일도 되고, 세계평화이었다가, 다시 아버지와 화해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할아버지 묘소 참배이기도 하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북에 있는 고종사촌을 만나고픈 여망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때로 새로운 평화 세상을 여는 가슴 벅찬 희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아시럽을 달리면서 비로소 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더 멀리 뛰기 위하여 그리움에 칩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내 그리움이 소중해졌다.

 그 시절 그 큰 좌절은 이제 와서 내 아시럽 횡단 마라톤을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정신력의 근원이요, 내 글의 자양분이 되고, 평화,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실행에 옮기는 영감이 되었고, 그것을 추진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영혼이 허기질 때 언제라도 꺼내서 우려먹는 곰국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기필코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거쳐 판문점을 넘어 광화문에 도착하겠다는 나의 결기의 원천이 된 것도 재미있고 통쾌하다.    

 

 이제 나는 말도 못 하고 속으로 애만 태우던 그때의 내가 아니다. 새로운 나의 은숙이를 위하여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운 아시럽이 키워낸 평화의 메신저가 되었다. 평생을 애틋해 하며 애태우게 하는 하나의 조국, 이미 동구 밖까지 나를 맞으러 나와 있을 수천만의 은숙이를 만나러 달리니 나는 지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위대한 운동선수들의 등번호를 영구결번으로 남겨두듯이 키스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나의 첫 키스를 영구히 결번으로 남겨두었다가 이제 북쪽에 입국하면서 잃어버렸던 나의 반쪽 조국과 뜨거운 입맞춤을 하려한다.     


 발단만 있고 전개도 없고 절정도 없고 결론은 더더욱 없는 짝사랑이라도 사랑이란, 한번 사랑했다는 기억만으로 영원할 수 있는 거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지만 변하지 않는 내 짝사랑의 기억이 있어서 좋다. 은수야, 경환아, 형성아 먼 길 와서 얼굴 보여줘서 고맙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라!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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