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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May 23.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명상록 121

마침내 삼족오 깃발 휘날리던 강역에 들어서다

       (마침내 삼족오 깃발 휘날리던 강역에 들어서다.)     

  9월 19일, 그 뜨거웠던 여름의 사나운 열기는 가셨지만 처처히 눈물겹도록 아름다울 나의 조국.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나, 대대로 이어진 애끊는 그리움의 나머지 반쪽에 가까워지면서 내 가슴속 열기는 더 뜨거워져 간다. 거침없는 내 발길이 만리장성 동쪽 끝의 관문 산하이관을 경쾌하게 통과한다.


 이 가을 익어가는 것은 들판의 곡식과 과일뿐이 아니다. 평화와 통일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불가역적으로 돌아가는 우리나라의 평화 시계와 나의 평화 발걸음이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이 기적과 같이 기분 좋은 일이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나누는 경계를 넘어서 이제 압록강이 가까워지면서 내 육체적인 체력은 한반도를 가로지르고 아시럽 대륙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과연 북쪽은 평화의 문을 열어줄까? 내 시선은 그 너머를 훌쩍 뛰어넘고 있는데!   

  

 친황다오로 들어서자 비릿한 바다 내음이 어머니의 양수처럼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인천 앞바다의 짠 내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또 저기 건너 내가 가려던 아버지의 고향 대동강 하류, 겸이포가 보이는 듯 가깝다.

 지난 8월 31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대서양 바다 끝에서 출발하여 1년여 만에 태평양의 우리가 서해 또는 황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하였다. 감흥이 치솟았다. 나 자신도 반신반의하던 것들이 현실이 되어간다. 친황다오는 중국 보하이, 발해(渤海)만에 닿아있는 허베이성의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이 불로초를 찾기 위해 이곳으로 사람을 파견했다 하여 친황다오라 부르기 시작했다.


 태산에서 제를 올리고 서복에게 삼신산(三神山)의 신선은 불로초를 먹고 불로장생한다는 전설을 듣고는 귀가 솔깃해진 진시황은 서복을 탐험대장으로 선단을 급조한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은 서복의 함대를 배웅하고 함양으로 가는 귀로에 산둥 평원을 지날 때 길 위에서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객사하고 말았다.

 서복이 찾아간 삼신산 중의 하나는 한라산이라 한다. 서복과 동남동녀(童男童女) 500쌍이 도착한 곳이 제주도의 정방폭포라고 한다. 불멸을 꿈꾸던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객사하고 말았고 그의 제국도 금방 무너졌지만 중국을 만든 인물로 진시황은 중국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산과 바다 사이에 있다고 해서 산하이관이라고 한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하이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옛날 삼족오의 깃발이 휘날렸을 고조선과 고구려의 강역이었을 땅에 들어서는 순간이다. 고구려 철기군의 말발굽이 대지를 흔들었던 울림이 느껴지는 듯하고 하늘을 덮은 일상의 미세먼지조차 고구려군이 힘차게 행진하며 일으킨 먼지구름 같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에서 느끼는 소담한 나라가 아니다.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초대형 제국이다.

 그 땅에 들어서는 날 평양선언이 발표되었다. 식민과 분단, 전쟁, 우리끼리의 아귀다툼으로 이어진 8천만 겨레의 100년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출발점이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찌질한 역사를 청산하고 웅지의 나래를 펼 순간이다. 미국 안에 주류세력으로 자리 잡은 죽음의 상인 ‘군산복합체’의 거대한 장벽을 과연 남북의 힘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보기 좋게 날려 보냈다. 우리 힘의 잠재력을 확인한 발걸음은 더욱 경쾌해졌다.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신명’에 우리도 놀라고 세계인들도 놀랐었다. 오늘 문대통령을 열렬히 환영하는 여명거리와 능라도 경기장의 저 인파들의 ‘신명’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느 나라에서도 보지 못했던 그때의 신명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까. 저런 뜨거운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새 평화 시대를 열어젖힐 그 사람들이다. 남과 북이 손을 마주 잡고 보니 그 손 위에 우리끼리 새 길을 열어가겠다는 베짱이 얹어졌다. 우리는 한번 한다면 하는 결기가 생겨난다.     

 산하이관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중국이 스스로 이민족과의 경계를 설정한 인위적인 선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두려워서 국가적인 역량을 총집결하여 제발 이 성 너머는 넘어오지 말라고 쌓은 거대한 성이다. 그 이민족이 바로 동이족이요, 고조선이다. 산하이관 바로 옆에 친황다오시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이 갈석산이 중요시되는 이유가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지역이기 때문이다. 산하이관은 인위적인 중국의 최북방 방어선이고 갈석산은 자연적인 방어선이다.


 이곳은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공간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내 심장은 첫사랑을 처음 바라봤을 때의 박자로 요란하게 박동을 치고 있다. 산하이관 주변에는 철 지난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은 베이징 근교에서 가장 아름답고 여름에 시원한 휴양도시라고 한다. 내가 묵는 숙소가 우리가 황해라 부르고 서해 바다라 부르는 곳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 펜션이다. 30층이 넘는 아파트이지만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가격이 올라가 적당한 가격의 6층으로 살짝 바다가 바라보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644년 이곳 산하이관을 돌파한 여진족은 베이징에 자리를 잡았다. 천지신령과 조상들에게 제를 올리고 중국의 주인이 된 사실을 자랑스럽게 고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고향 만주를 봉쇄해버렸다. 이 후 200여 년간 청 제국은 한족을 비롯한 이민족의 만주 이주를 금했다. 그렇게 19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 광활한 지역의 인구는 고작 300만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 1869년 함경북도 일대에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이재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먹고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그들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토를 일구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해산물 식당을 찾아서 저녁으로는 일 년여 굶주린, 해산물, 서해의 살진 게와 소라를 삶아달라고 하고 낙지 몇 마리는 그냥 손질해서 잘라만 달라고 하니 놀란다. 이 사람들은 아직 생으로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다. 가방에서 거의 일 년여 잠들어있던 초고추장이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산하이관 바로 옆에 노룡두라고 있다. ‘노룡두’는 장성의 시발점에 있으며, 마치 늙은 용의 머리가 발해만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같다고 이름 붙여졌다. 대륙을 가로지르며 만 리를 달려온 장성의 모습이 거대한 용의 모습과 같아 끝에 용의 머리 형상을 만들어 용이 되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으로 보인다. 나는 만리장성과 같은 거대한 축조물을 볼 때마다 인간들에 대한 막막하고 알 수 없는 슬픔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 옛날 사람들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보다 참혹한 노동을 감수하여야 했다. 진시황 초기에 시작된 장성 축조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한다. 장성 축조에 차출된 청년들은 거의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강제로 동원되어 기아와 질병, 추위와 산등성이까지 돌을 메고 올라가야 하는 난공사로 수많은 젊은이가 죽고, 주검은 장성의 바닥에 파묻혔다고 하니 장성은 현존하는 가장 긴 무덤이 되었다.

 산하이관에는 수많은 전쟁과 사랑의 애끊는 이야기가 수없이 전해져 온다. 맹강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맹강녀의 남편은 결혼 3일 만에 여름 홑옷만 입고 장성의 인부로 징용되어 겨울이 닥쳐와도 소식이 없었다. 그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 솜옷을 정성껏 만들어 보따리를 안고 몇 달 만에 만리장성에 도착한다. 그러나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에 너무도 원통해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더니 장성이 무너지고 남편의 시신이 나왔다.


 장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에 대노한 진시황은 맹강녀를 잡아들였다. 잡혀 온 맹강녀를 본 진시황은 그녀의 미모에 반하여 후궁으로 삼으려 했다. 남편의 제사를 지내게 해주면 그리하겠다고 약속하고 제사가 끝나자 맹강녀는 남편의 유골을 안고 흰 거품이 이는 산하이관 앞바다로 뛰어든다. 후대인들은 만리장성이 잘 바라다 보이는 곳에 맹강녀의 묘를 만들고 동상을 지어 지조와 절개를 지킨 그녀를 기리고 있다.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공격당하자 오삼계는 50만의 병사를 이끌고 북경을 구하러 가던 중에 황제가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자성에게 항복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의 애첩이 이자성의 부장에게 겁탈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하이관으로 돌아가 대치중이던 청군에게 산하이관의 문을 열어주었다. 덕분에 청군은 피도 흘리지 않고 북경을 접수해버렸다. 명의 시대에서 청의 시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시 30대의 열정적인 사나이는 어쩌면 조국보다도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한 것을 참담해 하는 ‘사랑 바보’였다. 자주 역사의 큰 물줄기는 한 사람의 사랑 때문에 확 뒤틀려 버리니 누구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역사가 평화의 역사로 확 물줄기를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혹시 트럼프의 사랑 때문에?     

 연개소문한테 혼쭐이 난 당태종은 “사람이 장성보다 낫다”라는 말을 남겼다. 만리장성은 북방의 적을 막아내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지어졌지만 정작 전쟁보다 더 큰 고통과 아픔을 인민들에게 안겨주었으며 큰 전란을 막지도 못했다. 전쟁은 물리적인 방어보다 외교와 소통, 민심을 얻으므로 막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남과 북은 군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기회가 마련하였으니 그것을 교육과 복지에 전용하면 더 나은 미래를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희망도 생긴다.     


 “우리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했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습니다. 남북관계를 전면적이고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끊어진 민족의 혈맥을 잇고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를 앞당기자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능라도 연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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