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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명구 Jun 25.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명상록 129

버스 안에서의 작은 통일

     (버스 안에서의 작은 통일)


 1년여 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출발할 때 나는 내가 과연 내가 단둥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단둥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분명히 신의주를 통과하여 평양에서 멋진 밤을 며칠 보내고 판문점을 통해서 마치 내가 큰일을 한 사람인 양 의기양양하게 광화문으로 들어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기 다 쏟아 부어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 오는 것은 성공했는데 오히려 자신했던 북 통과가 압록 강가의 안개 속처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압록강 앞에서 울보가 되었다. 저 너머를 바라보면 동공에 힘이 빠지고 눈물이 자꾸 난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있는데 끝없이 달릴 것 같은 내 발걸음이 여기서 잦아드는 게 안타깝다.

 단둥에서 압록강을 못내 건너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마음이 착잡하다. 분단의 나라에서 태어나 그곳의 뒤틀린 환경에서 자라고 나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슬픔과 허망함은 오히려 친숙한 것이다. 나는 에둘러 그리움을 찾아 나선다 했고, 할아버지 성묫길이라 했고, 아버지와 화해의 길이라고 했고, 고행의 수도 길이라 했다.


 또 세상을 만나보는 여행길이라 했지만 혁명의 기가 흐르고 항일 무장투쟁의 본거지인 만주벌판을 순례하고 이제 다시 연해주(沿海州)로 넘어가면서 내 몸 깊은 곳에서 끊는 혁명가의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달리기는 나에게 피를 흘리지 않고도 싸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저 강 너머 안개 속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저 강 너머로부터 세계사적인 대전환기의 기운이 솟아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용의 입에 물린 여의주 같은 붉은 해가 매일 아침 한반도에서 넘어온다. 저 상서로운 기운은 극과 극의 모순을 극복하고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아우르는 상생과 화합, 공존과 번영의 새 아침을 열 것이다. 희망의 빛이 한반도로부터 솟아오르고 있다.     

 초겨울 북방의 나라 러시아의 국경을 넘는 버스의 창문을 뚫고 따뜻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온다. 한국에서는 이미 수명을 다해 수십 년 전에 사망신고가 내려졌을 버스가 이곳에서 환생해서 한국의 학원광고가 그대로 남아있는 채 옹당이 진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낯설다.


 국경을 통과하고 끝없이 펼쳐진 갈대 우거진 벌판을 달릴 때 버스 안에서는 영혼의 끝자락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듯한 러시아음악이 감미롭게 흘러나온다.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이미 국운이 다한 나라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이곳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했었다.


 가족사와 국가의 역사란 언제나 얽히고설키게 마련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은 나는 핏속에 흐르는 GPS 자동항법장치에 의해서 모강을 찾아가는 연어처럼 뭔가 모를 힘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아득한 느낌을 받는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군인이었던 증조부가 김옥균 등의 갑신혁명에 실패하자 망명해있던 곳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가 가는 길에 황해도의 송림에서 할머니를 만나 정착하고 그곳에서 해방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그 후 할머니가 시집간 딸 하나 남겨두고 아들 5형제 손에 잡고, 등에 업고 내려오셔서는 영영 되돌아가지 못하시고 통한의 세월을 살다 돌아가셨다.     


 남북한과 러시아의 삼각 협력을 통해서 동북아 공동번영의 전진기지가 될 연해주는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해 오면서 이주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망명하여 항일의 중심지로 떠오른 곳이기도 하다. 특히 우수리스크는 내가 아시럽 마라톤을 시작한 이준열사 기념관과 관계가 있다.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특사이자 대한광복군 정부 대통령 이상설이 활동한 무대이기도 했다.

 안중근은 현재의 크라스키노에서 12명의 비밀 결사체 ‘동의 단지회’를 조직하여 왼손 무명지를 끊고 태극기 위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썼다. 그는 만석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개구쟁이로 자라며 영웅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공부보다는 무예를 익히기를 좋아했는데 ‘백범일지’에서 김구선생은 “안중근은 500m 떨어진 곳에 솔방울도 한 번에 명중시켰다.”라고 적었다. 안중근이 거사에 쓴 권총은 최재형이 마련해준 것이라고 한다. 연해주 동포들에게는 페치카최로 불린 최재형은 안중근의 남은 유족들을 돌봐준 사람이기도 하다,


 단둥에서 연길까지는 고속열차를 타고 연길에서 하룻밤을 잔 후 아침 7시에 우수리스크 행 버스를 탔다. 버스에는 약 20여 명이 탔다. 훈춘에서 한 번 멈췄는데 옛날에는 러시아 보따리 장사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고 한다. 바로 옆 건너편에는 아까 버스표를 살 때 도움을 준 조선족 여자가 앉았고 사람이 많지 않았으므로 듬성듬성 앉았다. 승객들은 눈을 감고 졸고나 국경의 황량한 풍광에 초점 없는 시선을 던지거나 했다.

 중국 국경을 넘을 때 버스에서 각자 자기 짐을 가지고 내려서 짐 검사를 받았지만 간단한 수속으로 끝났다.  러시아 국경에 들어가서 입국카드를 적고 있는데 북한 사람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영어 글자를 모르는데 대신 적어달라고 한다. 내 손에는 북한 여권이 들려져 있었다. 


‘1959년생, 김00’ 여권번호 등을 적고 국가 이름을 적는 난에서 여권에 새겨진 국가 명을 바로 찾지 못하고 “국가 이름이 뭐죠?”하고 묻는 촌극을 벌였다. 그 사람은 당연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조선이요.”하고 대답하고 난 “그것 말고요!” 하며 내 것의 ‘Republic of Korea’를 보여주고는 곧 그의 여권에서 국가 명을 발견하였다. DPR Korea’ 입국 도장을 받고는 내게 다가와 “고맙습네다.” 하면서 내 손을 잡는다.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단체여행객으로 보이는 일행과 러시아인 몇 명이 내리고 나니 이젠 버스에는 한민족 혈통의 사람만 6명이 남았다. 나와 중국에서 청바지 공장을 한다는 젊은 사람이 남쪽이고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이 북쪽 사람이고 우수리스크에 사업차 자주 간다는 조선족 한 명이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도 되어서 나는 준비해간 초코파이 한 상자를 열었다. “이것 좀 드세요!”하고 두 개씩 나누어 주니 다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더니 내가 이거 남쪽 과자니 “맛 좀 보세요!”하고 말하니 마지못한 척 받아든다. 10시간 정도 가는 6명이 탄 좁은 버스 안에도 알 수 없는 3.8선은 있어서 서로 말을 섞지 않는다.


 나는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내 소개를 간단히 하면서 아시럽횡단 마라톤을 소개하였다. 금방 젊은 남쪽 사람은 인터넷으로 나를 검색하더니 “와 대단하세요!” 한다. 조금 전 내가 입국카드를 대신 작성해주었던 김00씨가 “정말입네까? 그걸 어떻게 증명합네까?”하고 묻는다. 나는 손목에 찬 GPS시계를 보여주며 이것을 스마트 폰에 연결하면 지도에 내가 뛴 거리, 시간 날씨 등 모든 정보가 나온다고 설명을 해주고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마을에서 간식도 사고 용변도 볼 수 있게 버스가 멈추었다. 화장실을 찾아갔다가 난처한 상황이 벌어졌다. 15루블을 내야 하는데 미리 환전을 못해 러시아 돈이 하나도 없다. 다시 나오면서 “화장실에 돈을 받네요. 어디 으슥한 곳이라도 찾아야겠어요.” 하며 투덜거렸더니 지금껏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북쪽 사람이 “이리 따라오시라요!”하며 돈을 대신 내주어서 용변을 아주 특별하게 시원하게 보았다. ‘통일 용변’의 시원함은 가슴까지 시원했다.  


 내리면서 북쪽 여자도 내게 “꼭 평양 거쳐서 서울로 달려가시길 빌겠습네다.”하며 응원을 말을 남기고 간다. 이렇게 남과 북이 만나 많은 작은 통일을 이루어내어 큰 통일을 만들어 가면 좋겠다.

 나는 어쩌면 돈키호테보다도 더 무모하게 뚜벅뚜벅 달리면서 실크로드의 동맥경화에 걸린 어혈(瘀血)을 풀어주고 평화의 시대, 상생 공영의 혁명을 꿈꾸었다. 나는 넘어지고 깨지고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더 결기를 다졌다. 이 일은 포기할 수도 없고 새 세상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함께해주고 마음 모아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그 길을 묵묵히 달려갈 것이다. 언제나 슬픔과 허망함에서 더 큰 희망과 용기가 나온다. 아까 내 손을 잡았던 김00씨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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