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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Jun 03. 2021

번역자가 된 영어가 싫은 남자

29살 영알못에서 외국어 2개를 익히기까지

 오늘은 역사와 상관없는, 약간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 보려한다. 요즘엔 영어를 포함해 외국어를 잘하는 분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필자 정도의 회화 실력으로는 어디가서 명함도 못 내밀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외국어 2개를 다루며 일하는 관계로 외국어를 익힌 나름의 비법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해 하는 분들을 간혹 만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당장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몇 년간 꾸준히 공부했을 뿐이다. 그러나 비법을 궁금해 하며 굳이 물어보는 분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 한 때는 필자도 같은 처지였으니 내가 외국어를 익히게 된 지난한 과정이나 시행착오 등을 이야기 해 보는 것도 조금이나마 참고는 되지 않을까 싶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유럽 역사를 심하게 좋아했다. 중학교 때 이미 대학은 사학과로 진학하리라 마음 먹었고 약간의 곡절이 있었지만 원하던대로 대학에 갔다. 대학 합격이 확정된 순간 스스로 철칙을 하나 세웠는데, 이후로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만 공부한다는 기이한 고집이었다. 실은 재미 없는 걸 절대 안 하려는 나태함에서 나온 핑계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대학 4년 동안 필자는 이 원칙을 미련스럽게 지켰다. 학부시절 내내 전공 공부만 했고 보고 싶은 책만(서양사 위주 인문, 사회과학 서적들) 읽었다. 고시 준비나 취업에 필요한 토익 공부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고 영어 회화 학원 다니기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다. 졸업할 무렵 어딘가 제출하라니까 마지못해 한 번 본 토익 성적은 겨우 600점대(PBT), 낯뜨거운 수준이었다. 사실 고등학교 때는 내신은 물론이고 수능 영어성적도 매우 좋았다. 하지만 4년간 영어와 담 쌓으니 퇴보는 순식간. 학부를 마치고 학사장교로 군대를 갔다. 전공 공부나마 열심히 한 덕분에 선발 시험은 합격할 수 있었나 보다. 어쩌다보니 주한미군과 같이 일해야 하는 부대에서 근무했는데 그래도 영어공부를 안 했다. 입시공부 했던 내공은 남아서 문서 해독, 번역은 별 문제없이 했지만 미군 담당자와 대화해야 할 때마다 고역이었다.


 3년 4개월 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제대할 무렵, 오래 고민한 끝에 유학을 가기로 했다. 영어도 못하면서 유학이라니...사실 이런 배경이 있었다. 대학에 합격하고 입학하기 전, <바다의 도시 이야기>라는 책을 읽었다. 상, 하 두 권 짜리였는데 오후부터 상권을 읽기 시작해 하권의 마지막 장을 덮으니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난생 처음 책을 읽다 밤을 새운 것이다. 그렇게 이탈리아는 내가 유럽사에서도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 됐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 대학에서는 이탈리아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사실상 없었다. 이탈리아 역사에 관한 번역서조차 손으로 꼽을만큼 드물었다. 몇 년 뒤, 필자가 제대할 무렵(2000년대 초)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결국 이탈리아사를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기이하게도 필자의 진짜 영어공부는 이 때 시작됐다. 대학원에서 이탈리아사를 배우고 싶지만 이탈리아어는 못한다. 박사과정도 하고 싶은지는 아직 확신이 없었으니 완전 기초부터 어학을 시작해야 하는 이탈리아로 가는 것보다 영어권에서 석사과정을 해 보며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영국을 찍었다. 이탈리아 밖에서는 이탈리아 역사 연구가 가장 활발한 나라이기도 하고 당시 영국 대학원의 사학과 석사과정은 대부분 1년이었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유럽에서 저가항공 여행의 붐이 폭발하던 시대라 지리적으로도 이탈리아에 가까운 영국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29살 늦은 나이에 유학을 떠났다. 회화를 익히려고 현지의 일반 어학원에 다니면서 대학원 지원에 필요한 토플시험 공부를 혼자했다. 한국에서 많이 보는 시험 교재, 문제집 등은 사지 않았고 토플 중급자용 문법 교재 한 권만 가지고 갔다. 공부 방법은 단순했다. 매일 인터넷으로 서너 시간씩 영어권 신문들을 찾아서 관심이 가는 내용의 기사를 읽었다. 모르는 어휘나 숙어들은 의식적으로 외우진 않고 마주칠 때마다 사전을 확인했다. 물론 처음엔 의욕적으로 단어장을 만들어서 그 어휘들을 전부 정리해 놓으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포기했다. 정리해 놓기만 하고 다시 펴 보질 않게 되는데 어차피 자주 쓰는 중요한 어휘들은 신문을 뒤지다 보면 곧 다시 마주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나올 때마다 사전 찾기를 번 하면 그 단어는 대개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잊어버리는 단어는 '너는 인연이 아니구나'라는 마음으로 그냥 넘겼다. 보통 글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으니까. 주말에는 가끔 중고생 수준의 역사 잡지나 인쇄된 신문을 사서 읽었다. 영국 신문들은 주말판에 보통 얇은 잡지 같은 부록이 딸려 있어서 한 부 사면 일주일 내내 두고두고 읽을 수 있다. 쓰기 공부는 그 날 읽은 기사들 중 마음에 드는 문구를 몇 가지 골라 똑같이 배껴 쓰거나 일부를 다른 어휘나 내용으로 약간 바꿔 써 보는 식으로 했다. 어학원 수업에서 내주는 숙제도 빠지지 않고 했다. 거의 대부분 무언가를 써 가는 게 숙제였기 때문이다. 가져 간 토플 문법책은 어떤 문장의 구조나 형식 등이 문법상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때만 꺼내 봤다. 문법책을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시도조차 안 했다. 사실 내 인생을 통틀어 '한 번 뗀'(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영문법 책은 성X 기초영문법이 전부다.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딱 한 가지 조언만 하라고 한다면 "문법책은 사전처럼, 법전처럼 사용하라"고 말하겠다. 절대 외우지 말고, 한 두번만 통독한다. 그 후엔 모르는 사항을 찾아보고 확인하는 용도로 쓰라는 뜻이다.


 읽기도, 쓰기도, 문법도 공부할 때 공통적으로 중요한 점은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 관심이 가는 내용의 글을 읽어야 하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문구나 문장들을 골라 써 봐야 한다. 그래야 장기간 꾸준히 계속할 수 있다. 문법도 마찬가지다. 언어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문법책은 누구에게나 지루하고 재미없다. 그걸 여러 번 통독해 외우려고 하면 정상인의 99%는 실패한다. 그 시간에 나에게 흥미있는 내용의 문장을 하나라도 더 읽고 써 보는 게 낫다. 문법책을 찾아볼 때도 이 문장 구조는 정말 이해하지 않으면 답답해 못 견디겠다, 짜증난다 싶을 때 찾아보면 된다. 그렇게 찾아 본 것은 대개 기억에 남기 마련이기도 하고, 납득이 잘 가지 않을 만큼 특이한 사항이 아니라면 토플이나 IELTS 같은 고급 시험에서 문법 지식을 묻는 문제로 거의 나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어휘 공부도 같은 원리다. 재밌게 읽은 글에서 알게 된 단어,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는 많은 글을 읽다보면 결국 기억에 남는다. 단어, 숙어를 외우기 위해 수 십, 수 백 번을 반복해 쓰는 일은 (그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면 모르지만) 굳이 할 필요 없다.


 솔직히 인정하자면 말하기 공부를 위해 필자가 따로 한 것은 없다. 그냥 영어가 국어인 나라에 가서 어학원을 잘 다녔을 뿐이다. 회화 공부를 하려면 현지에 가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필자의 말하기 실력이 별 볼 일 없기도 하고 회화 연습을 위해 별도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니 한국에서 영어회화를 향상 시키려는 분들은 참고하실 게 별로 없을 거라는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공부해서 석사과정에 입학했고 무사히 학위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토플 점수를 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원 과정을 해 내기에는 영어 실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1년 내내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모두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낙오하지 않고 버티니 모르는 새 영어실력이 크게 늘긴 했다. 특히 읽기와 듣기.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말수가 적고 숫기도 별로 없는 성격인 필자는 석사를 마친 뒤에도 말하기에는 계속 어려움을 느꼈다. 유창하진 않더라도 부담감 없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1, 2년 뒤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정신없이 바쁜 환경에서 빨리 의사소통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 문법 같은 거 신경쓰지 않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오는 정도에 이를 수 있었다.


 석사를 마치자 박사과정을 해 보고 싶어졌다. 석사논문은 분석하려는 이탈리아 원전의 영어 번역본이 있어 그걸 읽었지만 박사 수준 연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더이상 이탈리아어 습득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이번에도 가급적 쉬운 문법책을 구해서 일단 한 번만 통독했다. 사실 이 때도 이탈리아어를 완전히 처음 접한 건 아니었다. 대학 1, 2학년쯤에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에서 운영하는 어학코스를 몇 달 다니며 초급과정은 수료했었다. 그 뒤로 완전히 손을 놔서 거의 백지수준으로 돌아가 있었지만 문법책 통독은 그런 면에서 다시 감을 찾는 데 도움은 됐다. 이 무렵 영국 모 대학의 박사과정에 지원을 해 봤는데 다행히 논문주제가 괜찮았는지 1년 안에 이탈리아어 고급 수준에 도달할 것을 조건으로 입학허가를 받았다.


 인문사회과학의 박사논문 쓰기는 대개 연구 주제와 관련된 분야에서 이전까지 어떤 연구물들이 나왔는지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영국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엔 주제가 이탈리아 역사니까 기존 연구들도 당연히 이탈리아 연구자들의 책, 논문이 많다. 이탈리아어 공부와 논문 쓰기에 필요한 기존 연구성과 조사를 병행하기 위해서 필자가 선택한 방법은 이렇다: 국립 중앙도서관(British Library)에 가서 온라인 카탈로그로 키워드(이태리어로) 검색을 한다. 검색된 목록에서 이태리어로 된 제목들을 보고 내 논문 주제와 밀접할 것 같은 책들을 골라 신청한다. 열람실에서 신청한 책들을 받으면 아직 본문을 읽을 수는 없으므로 각 책의 목차와 참고문헌 페이지들만 꼼꼼히 살핀다. 어느 책이든 목차는 대개 완성된 문장이 아니라 짧은 구문과 단어들 뿐이기 때문에 빠르게 새 어휘를 접하기에도 좋고(새 단어는 그 때마다 사전을 확인한다), 초급 수준에서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참고문헌 목록도 비슷하다. 책이나 논문 제목, 서지사항들만 나열돼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목록에서 새로 발견한 내 연구주제와 관련돼 있어 보이는 책, 논문들은 나만의 데이터 베이스에 바로 정리해 두면 기존 연구성과 조사에도 기초 자료가 되니 일석이조다. 여기까지 마치면 빌린 책을 반납하고 카탈로그나 내 데이터 베이스에서 다른 책들을 뽑아 열람 신청, 그리고 똑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매일 도서관에 가서 이 과정을 하루 5시간 이상씩 계속했다. 두 세달쯤 지나니 내 연구분야에서는 어떤 책을 빌려도 챕터 제목, 책이나 논문 제목들은 100% 해석 가능해졌다. 이 때부터는 책의 본문 일부를 읽기 시작했다. 빌린 책의 목차를 보고 제일 흥미있어 보이는 챕터를 골라 읽어본다. 당연히 어렵고 이해도 잘 안 된다. 너무 어려워서 짜증이 나면 과감히 중단하고 다른 챕터를 읽거나 아예 다른 책을 폈다. 그러나 단 한 단락을 읽더라도 모르는 어휘나 이해 안 되는 문법적 요소들은 가급적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하고 넘어갔다. 처음에는 하루종일 책과 씨름해도 한 두 페이지 읽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이 과정을 또 몇 달 계속하니 어느 샌가 하루 한 페이지가 서너 장이 되고 십여 페이지가 돼 있었다. 물론 독학으로 읽기 위주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소개해 준 원어민 교사의 개인 교습도 반 년 넘게 병행했다. 그 사이 유럽의 IT 환경도 많이 나아져 해외에서 온라인으로 일부 이탈리아 방송을 다시 보는 게 가능해졌다. 듣기 연습용으로 이탈리아 국영채널 RAI 3의 역사, 문화 예술 관련 프로그램들을 종종 찾아보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이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짧은 시간 동안 실력이 많이 향상됐음에도 불구하고 1년 반이 지났지만 고급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가장 부족했던 부분은 말하기인데 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박사논문을 쓰려면 1차 사료를 찾아 내고 분석해야 하며 그러려면 이탈리아의 여러 도서관이나 문서고 방문은 필수다. 원하는 자료를 찾으려면 당연히 사서, 문서고 직원들과 의사소통도 가능해야 한다. 결국 지도교수님의 권유에 따라 이듬해부터 다른 학교로 옮겨 박사과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영국 대학들은 보통 가을에 새 학년을 시작한다. 새 학교 입학까지 남은 반 년 이상의 시간은 이탈리아에서 어학 실력을 높이는데 집중했다. 사설어학원과 국립 어학 교육기관(외국인을 위한 대학)을 차례로 다녔는데 여전히 회화가 많이 미흡하지만 그럭저럭 고급 수준에는 도달할 수 있었다.


 이상이 외국어 두 개를 익히게 된 길고 긴 과정이다. 박사과정에 재입학한 뒤로는 내 연구와 논문쓰기만 해도 벅차서 사실상 별도의 어학공부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유학생활 마칠 때까지 영어는 계속 늘었다. 4년간 논문쓰면서 영어로 무수히 많은 글을 읽고 썼으며 일상 생활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끊임없이 영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하다. 이탈리아어는 역시 논문작업 덕에 많은 책을 봐서 읽기는 꾸준히 발전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영화, RAI 다시보기, 음악 등 멀티미디어들을 이용한 것은 물론, 가끔 이탈리아에 가서 문서고, 도서관 조사도 하며 한 달씩 머물기도 하고, 여행도 가고, 원어민 친구들(전공 특성상 박사과정에서 알게 된 동료 대학원생들 중 이탈리아인들이 많았다)과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할 때도 있었지만 회화 능력의 전반적인 퇴보는 피할 수 없었다.


 이제와 곰곰히 따져보면 언어에 소질도 흥미도 없었지만 결국 외국어 두 개를 익힐 수 있었던 필자의 원동력은 절실한 필요와 맹목적인 애정이었다. 어쩌다보니 이탈리아 역사를 배워 보겠다는 집착에 빠지게 됐고 영어도, 이탈리아어도 거기에 필요하니까 익혔다. 외국어 학습에 유일한 왕도라면 해당 언어를 끊임없이 접하는 것뿐인데 필자의 경우는 언어가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에 이르는 수단이었기에 동기부여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어떤 외국어를 꼭 익히고 싶다면 그 언어 자체에 매달리려 하기 보다는 자신이 평소 정말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대상을 어떤 식으로든 언어 학습과 연결시킬 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출발점이겠다. 예를 들어 영어를 익혀야 하는데 야구를 미친 듯이 좋아한다면 야구에 관한 영문 서적들이나 온라인 자료들을 수집해 보자. 수집하다 보면 내용이 궁금해질 테고 하나 둘 제목만이라도 읽으려 꾸준히 시도하다보면 어느 날 제목을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는 내용까지 읽게 될 수 있다. 문학을 좋아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글들을 우선 찾는다. 찾다보면 대개 좀 경력 있고 이름 있는 작가들은 짧은 에세이나 신문 기고문, 메모, 어록, 인터뷰 등도 꽤 남겼다는 걸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그런 글들로 읽기를 시작하는 게 좋다. 짧고 쉬우니 성취감을 얻기 적합하고 그런 작은 성취감이야말로 읽기에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동력으로 최고다. 짧은 글을 하나씩 꾸준히 읽다보면 나중에는 시, 소설 한 권도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한 가지: 사전과 단어장, 문법책은 곁에 두고 항상 습관처럼 찾아봐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물론 회화는 이런 식으로 익힐 수 없다. 하지만 학원을 다니든 원어민 개인교습을 받든 읽기가 어느 정도 되기 시작한 상태에서 회화 연습을 병행하면 좀 더 빨리 발전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유럽 언어는 무엇을 선택하든 한국인에게 배우기 쉽지 않다. 기본 어순도 다르고 발음 체계와 문법의 기본 원리 자체가 한국어와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유럽 언어 여러가지를 배우고 싶은데 어떤 언어들을 혹은 어떤 언어부터 익혀야 할지 망설이는 분들을 위해 약간의 참고할 만한 정보를 남긴다. 슬라브계열과 켈트계 언어를 뺀 대부분의 유럽어는 무엇이 됐든 하나를 잘 하게 되면 다른 언어를 익힐 때도 상당히 유용하다. 불어를 잘하면 영어나 스페인어, 이태리어를 배울 때 상대적으로 덜 어렵고 독일어를 잘하면 인접 게르만계 언어(네덜란드, 덴마크 등)를 익힐 때 유리한 식이다. 심지어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언어들 사이도 그렇다. 필자의 경우엔 대학원 학업이 가능한 수준의 영어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배울 때 알게 모르게 상당히 도움이 됐다. 그만큼 서유럽 언어들 간의 유사성은 크다는 얘기고 사실 이것이 서양인들 중 외국어를 여럿하는 사람이 꽤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래서 서유럽 언어 중 무엇을 먼저 익혀도 결국엔 다른 언어 습득에 도움이 되긴 하는데 처음 배우는 언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나름의 장단은 있다. 영어는 유럽어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언어에 속하고 그만큼 효율성이 강하다. 문법이 매우 간단하고 실용적이며 표현이 간결하다는 게 강점이다. 역사적, 문화적으로 로망스계 언어와 게르만계 언어의 영향을 모두 받았기 때문에 유럽 언어를 입문하는 대상으로 이상적일 수 있다. 반면 문법이 단순하다는 게 독이 되는 면도 있다. 로망스계 언어도 게르만계 언어도 대개 인칭에 따른 동사변화가 많고 시제와 전치사+정관사, 대명사의 격변화 등이 복잡한데 영어는 이런 것들이 별로 없으니 영어를 발판으로 다른 언어를 배우게 되면 초반에 문법에서 꽤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발음도 약점이다. 영어는 발음과 철자 등이 유럽 대륙의 다른 언어들과 꽤 많이 달라져 있는 언어다. 서양인들 가운데도 모국어가 영어인 사람들이 다른 외국어를 할 때 (어휘 구사력이나 유창함 등을 떠나서) 발음이 안 좋은 경우를 특히 많이 볼 수 있는데, 영어의 이런 배경 때문이다. 모국어가 한국어인 우리들이 크게 걱정할 부분은 아니지만. 로망스계 언어들(불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카탈루냐어, 루마니아어, 로망쉬어, 사르데냐어 등)은 문법이 매우 복잡하다. 옛날 언어의 특성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언어들이어서 글로 쓸 때 표현이 좀 장황하게 보이는 면도 있다. 실제로 같은 내용을 써도 영어보다 로망스계 언어 문장들이 더 길다. 그래서 이태리어를 영어로 번역한 책들을 보면 원서보다 많게는 10%까지도 페이지가 줄어든다. 그러나 로망스계 언어는 서로 문법의 유사성이 크고 발음구조도 비슷하며 무엇보다 어휘도 흡사한 것들이 상당히 많다(대개 라틴어 기원인 것들). 따라서 로망스어 하나를 익혀 놓으면 다른 유럽어를 배울 때 어휘, 문법 등에 익숙해 지는데 매우 유리하다. 독일어는 필자도 잘 모르기 때문에(최근에 독학으로 배우기 시작했을 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영국에 사는 동안 모국어가 독일어나 게르만계 언어인 사람들이(필자의 석사 지도교수와 첫 박사과정 지도교수님도 둘 다 독일계였다) 평균적으로 영어를 빨리 배우고 그만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걸 알았는데 영어가 가지고 있는 게르만 언어의 뿌리 때문인 듯하다. 겉보기에는 현대 독일어와 영어는 문법과 어휘들이 크게 달라보이지만 언어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나 정서처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에서 독일인들이 여전히 감지할 수 있는 무언가가 영어 속에 꽤 많은 모양이다.


 영어를 먼저 배웠고 영어를 쓰는 것이 더 편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어를 더 좋아한다. 둘 다 필요에 의해 익힌 언어지만 이탈리아어를 배울 때는 '아름다운 언어구나'라는 느낌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던데 반해 영어에서는 그런 걸 느껴 본 적이 없다. 필자는 영어에서 효율성과 경제성을 본다. 영어는 현대의 생활 방식에 최적화 된 언어이고 과학과 학문에 알맞은 언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반면 보다 오래된 언어인 이탈리아어는 문화의 언어, 미를 위한 언어로 더 어울려 보인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많은 시간과 어려움을 지불해야 했지만, 두 언어를 통해 새로운 두 개의 세상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내 인생에 주어진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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