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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희 Feb 10. 2020

월급쟁이의 끝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일

휴직을 하고 안 좋은 점을 꼽으라고 한다면 안정적인 월급이 없어진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쓰는 돈도 많은데 버는 돈까지 없어지면 남보다 지출이 두배가 된다. 그동안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날 정해진 시간에 입금되는 달콤한 사이버머니와 같은 월급 덕분에 그나마 내가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 같. (물론 월급 다음날은 떵떵거릴 수 없게 된다.)


여행을 하거나 필요에 의해 휴가를 내서 회사에 가지 않더라도 혹은 근무일수가 매달 다르더라도 그놈의 달콤한 월급은 꼬박꼬박 통장에 잘만 찍혔다. 어쩌다 공휴일이 많은 달에는 주 4회 출근이라유러피안 같은 느낌이 난다며 신나 하곤 했다. 내 젊음의 시간이 지나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마냥 좋아했었다.


그렇다고 휴일을 특별하게 보낸 것도 아니었다. 많은 직장인들이 평일에 퇴근하고 1시간이 아까워서 하나라도 더 보고 자기 위해 스마트폰을 못 살게 굴다가 늦게 자곤 한다. 내가 알기론 대부분 생산적이지 않은 유튜브, 인스타, 쇼핑 등에 시간을 소비한다. 주말엔 늦잠 자고 일어나서 점심 먹고 다시 눕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하루 종일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한다. 평일과 주말의 차이가 뭘까? 결국 시간을 무의미하게 쓰는 건 똑같을 뿐이다.


월급이 안 나오면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일.


지나가는 카페의 커피 향이 좋아도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일. 아메리카노만 마시게 되는 일. 지나가다가 발견한 예쁜 쓰레기를 함부로 사지 못하는 일. 엄마랑 밥 먹을 때 내가 계산하지 못하는 일 등과 같은 제약이 많이 생긴다.


TV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남편한테 생활비를 받아서 쓰는 주부들의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번 돈이 아닌 남이 번 돈을 용돈 받아서 생활하니 정당하게 지불할 때에도 떳떳지 못한 것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육아휴직을 하고서도 일찌감치 복직하는 이유이다.


지금의 내 젊은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여행을 다니던 때가 있었다. 돈이 없어도 신용카드로 결제하고 다음 달 월급으로 메꾸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1년간 월급이 안 나온다고 생각하니 계획을 잘 세워야만 했다. 여행은커녕 심지어 나의 런던 생활에 필요한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이미 부모한테 손 벌릴 시기는 지났고 나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휴직을 하기 위해서는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경력증명서가 아닌 차라리 재직증명서가 나올 때 하루빨리 대출을 신청하는 편이 낫다.


사람들이 회사 욕을 죽어라 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이 월급에 있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이제 다른 곳을 알아봐서 이직하기도 부담스럽고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자신감도 많이 낮아졌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두 돈이 필요하다. 사람을 만나면 밥이라도 사맥여야 예의이고 상대가 밥을 사면 내가 커피라도 사는 게 우리나라식 예의이고 정(情)이다. 백수가 된 이후부터는 사람 만나는 횟수를 많이 줄였다. 그 전에도 사람을 자주 만난 건 아니지만 밥을 사맥일 돈도 없었을뿐더러 최대한 가십거리를 피하고 싶었다. 만나면 특별한 거 없는 내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야 했다. 에너지를 많이 낭비했다.


'임신한 것도 아닌데 휴직을 왜 해?'

'그래서 뭐가 하고 싶은데?"

"남편이 허락했어?"


위와 같은 도돌이표식 멘트를 계속 들어야 했고 그들에게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도 이유도 없었지만 일일이 구구절절 설명하는 나 자신이 스스로 나를 더 멋지게 포장하려는 것 같아서 집에 돌아오면 허탈하기도 했다. 휴직하고 그냥 쉰다고 말하면 되는 일인데 일 년 동안 뭘 할 거고 뭘 어떻게 할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했던 것 같다. 꽤나 대단한 걸 해야 상대가 납득할 것만 같았고 그땐 그래야 되는 줄로만 알았다. 내가 나를 위한 쉼이 필요해서 나의 일 년을 쓰겠다는데 왜 사람들한테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뒤에서 내 흉을 보고 다니진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차피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기억한다. 제 아무리 훌륭한 변명을 늘어놓아도 결국엔 본인이 생각한 대로 정리하고 닫아버린다. 입만 아픈 꼴이다.


물론 부정적인 생각이 아닌 나의 꿈에 대해 먼저 응원의 박수를 보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해준 말, 정말 힘든 시기에 내가 듣고 싶었던 말, 나에게 필요했던 말 이기에 잊을 수가 없다. 일 년 후 그들한테 '저 이렇게나 성장해왔습니다!'하고 나타나고 싶었다.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그대가 보낸 메시지 덕분에 이렇게 멋지게 돌아올 수 있었다고. 그리고 내가 그들로부터 들었던 좋은 메시지를 또 다른 새로운 삶을 꿈꾸는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싶다. 좋은 메시지는 긍정의 힘을 길러주고 상대를 좋은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무언가에 대한 절박함, 간절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응원 메시지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나의 꿈, 도전에 대한 생각이 부정적으로 남아있고 자기의 생각만을 강요하는 누군가가 있다. 더 이상 나는 그들에게 돈이랑 시간을 낭비하는 짓 따위는 안 하기로 했다. 일 년 후에 내가 돌아오면 그들은 나에게 또다시 부정적인 말을 건넬 것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고쳐쓰면 안되는 것, 바꿔써야 하는 것.


경제적 자유를 벗어남과 동시에 일 년간의 휴직.

언젠가는 다시 월급쟁이가 되는 그 날이 기다려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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