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식물과 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ice Sep 01. 2022

보랏빛 꽃 폭죽 소리가 메아리치던 여름방학

도라지꽃

아이는 얼마나 많은 어른들의 상냥함을 먹고 자라는가! 한 사람의 충만한 인생은 그가 어릴 적부터 받은 사랑의 기억들로 채워지는 게 틀림없다. 장난꾸러기 시절, 시골 할머니 집에서 보냈던 어느 여름방학의 추억이 내게는 그런 기억의 조각이다.


할머니 집은 우리나라 대표 두메산골 경북 봉화. 북쪽으로는 강원도, 남쪽으로는 안동, 서쪽으로는 영주시와 접하고 있는 내륙 산간 시골 마을이다. KTX 고속열차도 자가용도 없던 시절, 우리 삼 남매를 데리고 할머니 집에 가는 일은 부모님에겐 ‘대장정’이라 할만한 고된 여정이었다. 부산진역에서 경부선을 타고 영주역에 내려 영동선으로 갈아타고 봉화역까지 간 다음,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까지 들어가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차비를 아끼기 위해 완행열차인 비둘기호를 타다 보니, 정차역만 해도 수십 개, 탑승 시간도 7시간 가까이 걸렸다.


다섯 식구 여행 가방에 하루 종일 먹을거리까지 챙겨야 하니 언제나 짐은 한가득. 우리 삼 남매는 삶은 달걀에 사이다를 먹는 기차 여행에 신이 났었지만, 애 셋에 그 많은 짐을 들고 먼 길을 다녔던 부모님을 떠올리면 아찔한 동시에 존경스러운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시골까지 가는 여정이 부모님의 시간이라면, 할머니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도시 아이들의 시간이 시작된다. 우리 삼 남매는 마을 아이들과 냇가에 나가 온종일 물놀이를 하고,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하곤 했다. 돌아올 때는 개구리와 풀벌레를 잡아넣은 채집통이 언제나 손에 들려있었다. 길에서 뱀이라도 마주치면, 겨우 중학생이던 언니는 동생들을 보호한답시고 막대기를 찾아들고 무섭게 때려잡는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물 한 바가지를 퍼넣고 펌프질 해 길어 올린 지하수로 세수를 한 후 대청마루에서 수박을 먹는 것으로 우리의 모험은 항상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집성촌인 마을에는 친척들이 모여 살았다. 옆집은 할아버지의 큰 형님댁, 앞집은 좀 더 촌수가 먼 할아버지네였다. 할머니들은 시집오기 전 고향 마을 이름을 따서 무슨무슨 댁으로 불렸다. 작은할아버지는 영주 시내에 사셨는데, 가끔 농사일을 하러 마을에 들어오시곤 했다. 마을 북쪽 저수지가 조성될 때 수몰되지 않은 조각 땅에 도라지 농사를 지으셨는데, 하루는 밭에 일하러 가면서 남동생과 나를 데려가 주셨다.


모네의 그림처럼 물안개 낀 보라빛 언덕을 처음 본 순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날 처음 도라지꽃을 보았다. 도라지는 7~8월에 보라색과 흰색으로 꽃을 피운다. 끝이 뾰족한 별 모양이다. 꽃이 진 후에는 꽃받침에 쌓여있는 뿔 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봄, 가을에는 뿌리를 채취해 먹는데, 우리가 흔히 식탁에서 접하던 쌉싸름한 도라지가 바로 그것이다.


작은할아버지의 도라지 밭에는 아직 피지 않은 도라지꽃들이 가득했다. 통통한 오각형 복주머니 같이 생긴 보라색 꽃봉오리가 참으로 예쁘고 신기했다. 게다가 봉오리를 누르면 잎이 갈라지면서 ‘팡’하고 제법 큰 소리를 냈다. 동생과 나는 그 소리가 재미있어서 꽃을 터트리며 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고즈넉한 저수지가 그날은 모처럼만에 ‘팡팡’ 꽃 폭죽 메아리로 소란스러웠다. 우리가 어찌나 꽃을 많이도 밟고 터트렸던지, 돌아오는 길에 저수지 건너편에서 밭을 보니 한쪽이 푹 꺼진 것이 확연할 정도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렇게 도라지 꽃을 터트려버리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고 한다. 이듬해 농사에 쓸 씨를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농부인 작은할아버지는 그걸 알면서도 오랜만에 도시에서 온 유손(猶孫)들이 마음껏 놀라고 우리를 내버려 두셨던 것이다.


여름철 도라지꽃을 발견할 때면, 무심한 듯 다정했던 작은할아버지의 그 사랑이 마음속에서 보랏빛으로 다시 피어난다. 한 여름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도토리묵과 두부를 만들어주시던 할머니의 굽은 등, “너희들 대학 가면 등록금은 내가 해주마”하며 잠든 손주의 이마를 한없이 쓰다듬던 할아버지의 거친 손도 떠오른다. 도라지꽃이 소환한 그 해 여름 시골 풍경 속에는 넘치게 사랑받았던 유년의 우리가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