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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Apr 15. 2022

나의 목표는 완주, 그것뿐이다.

 어느덧 열차 창 밖으로 노을이 내린다. 부산을 출발한 KTX는 쉬지 않고 서울로 서울로 내달린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비몽사몽 자다 깨다를 반복 하다 보니 벌써 이 여정도 절반쯤 지나는 중이다.


 어제 갑작스레 결정된 출장. 오랜만에 일로 방문한 부산은 급한 일정 탓에 한번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다. 일이 끝나자마자 기차를 놓칠 세라 부산역으로 냅다 내달려 허겁지겁 차에 올랐다. 그동안 밀린 이메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비로소 하루를 정리할 시간이 생긴다.  


 어제는 내게 의미 있는 하루였다. 입사 후 처음으로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날이다. 뛸 듯이 기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덤덤하다. 한 달이 넘도록 목말랐던 성취의 순간이 현실로 다가왔는데 스스로에게 이토록 인색하게 구는 나 자신이 참 다. 성취를 만끽하지 못하고 다음에 넘어야 할 산만 바라보는 이 힘겨운 여정은 그래서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확신이 없어서일까. '잘하고 있는 걸까? 내가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일까?' 마음속으로 수십 번을 되뇌어 봐도 아직은 확실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형태적으로 보면 아주 오랫동안 내가 꿈꿔오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맞다.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가며 너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일. 그러나 꿈과 현실 사이엔 언제나 그렇 괴리가 있다. 물리적으로 자리에 앉아 있음으로써 월급의 반 정도의 일은 하고 있다고 우길 수 없으니 성과가 표면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땐 계속 마음이 불안하다. 그리고 그 불안이 자꾸만 자신감을 갉아먹는다. 이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으려 예전의 나를 떠올려 본다. 스스로 잘 해내고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잠시 동안은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그 당시의 자신감과 여유 넘치던 마음가짐을 떠올려 지금의 내게 덧입히려 애써본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시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바로 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누가 그랬나. 늘어가는 숫자는 반대로 사람을 자꾸 작아지게 만든다. 이젠 어딜 가도 실무에서 활발하게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다. 그들과 함께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것이 즐거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문득문득 느껴지는 거리감에 풀이 죽는다. 이래서 자꾸 '동년배'를 찾게 되나 보다. 필터 없이 이야기하고 나를 거리낌 없이 내보일 수 있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국기업이었다면 당연히 관리자 직급으로 불리며 하는 업무도 그 직급에 맞게 변화했을 테지만 임원 외에는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실무를 하는 회사의 특성이 어느덧 내게는 부담스러운 나이가 되었다. 서로를 존대하며 위아래 없이 누구님으로 부르는 문화가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이 10년이 넘도록 상하가 있는 관계에 익숙해져버렸나 보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나 큰 차를 타다가 작은 차 못 탄다는 말이 있듯 팀장님으로 대우받으며 일하던 시절이 솔직히 조금은 그립다.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까. 법적으로 은퇴할 나이가 되려면 20년도 넘는 시간이 남았지만 실무자로서 현장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늠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걱정도 나이가 가져다주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다. 앞으로 나이는 많아질 일만 남았는데 그 나이 앞에 내세울 경력과 경험치가 더 이상은 나를 지켜주는 무적 방패가 되지 않는다. 화려한 직급과 감투 없는 나는 다시 다른 이들과 나란히 출발점에 섰다. 특히 내가 가질 수 없는 젊음과 열정을 가진 이들이 즐비한 대회에서 나는 어디까지 그들과 나란히 어깨를 곁고 달릴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어느덧 어스름이 어둠이 내려앉은 서울역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으로 혼자 국밥 한 그릇을 시켜 허기진 배를 채운다. 집까지 꼬박 두 시간의 여정을 또 소화하려면 든든히 먹어 두어야 한다. 나이 들면 결국 밥심밖에 믿을 게 없다는 우리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 밥심으로 힘을 내어 달려볼까. 비록 다른 이들과 똑같은 속도로 달리진 못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를 해내는 마라토너가 되어보자. 한발 한발 내딛다 보면 결승선은 언젠가는 나오게 마련이다. 나보다 앞서가는 이들에겐 다툼 없이 자리를 내어주고 연대가 필요한 이들에겐 손을 내밀어 끝까지 한번 달려가 보자. 지금까지는 추월당할까 무서워 잠시 목을 축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젠 옆도 돌아보고 뒤도 돌아보며 나만의 페이스대로 이 레이스를 즐겨보자. 승진도 높은 연봉도 내 목표가 되지 않는 이 레이스에서 나의 최종 목표는 완주. 그것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담감을 조절하는 것도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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