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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Aug 04. 2020

나 혼자 산다

그런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손수 밥을 지어먹으면서 생활하는 그러니까 자취인의 삶에 들어서면서 

누구나 한 몇 달간은 시도하는 일들을 나도 했다.


손수 밥을 지어먹을 생각에 온갖 조리 도구와 식재료를 쟁여 놓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를 찾아 그 좁은 방구석에서 겨우 1구짜리 인덕션에 끓이고, 찌고, 굽고 

쌩난리를 쳐가며 겨우 밥상을 차리면 하루 반나절이 후딱 가 있었다. 

오평에서 삼시세끼를 찍어야하는 수고로움이란. 


그렇게 몇 번 시도하다가 

아, 오평은 햇반과 3개 만원 하는 반찬팩에 비비고가 딱 적당한 주거공간임을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관뒀다. 

(그 뒤 나와 비비고는 서로를 먹여 살리는 존재, 진정한 상생관계가 되었고 지금도 그 관계는 유지 중이다) 


그 자각은 오평에서 첫여름을 보낼 때 시작됐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 무심결에 벽을 바라봤는데, 벽지 무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지는 하얀색 바탕에 보일 듯 말듯한 회색 줄무늬가 있고, 그 위에 비정형의 은빛 점들이 박힌 디자인인데 

그 점들이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멈췄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잘못봤나 싶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다시 봤지만 분명 움직인다. 


헉! 


좀 더 유심히 관찰하려고 얼굴을 들이대는 순간, 나는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수많은 점들이 언제부터 그랬는지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것이 벽지의 무늬가 아니라 생명체란 사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뭐지? 어디서 나왔지? 

흥분상태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의 벽을 살펴봤다. 그리고 옷장 문을 열었는데...


아! 


사태는 심각했다. 옷장에 걸어둔 옷들 사이로 곰팡이가, 곰팡이가....다음은 상상에 맡기겠다. 

하던 일을 멈추고 황급히 옷장의 옷들을 냅다 밖으로 꺼내 상태를 살폈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한 옷들은 따로 모아 쓰레기봉투에 넣었고, 옷장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더 급한 건 움직이는 점들이었는데, 약국으로 급히 뛰어가 비오킬을 사 와서는 벌레 박멸을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원인이 습한 환경 때문이라는 걸 알고는 급히 제습기와 습도계를 사들였다. 

외출하기 전 잊지 않고 제습기를 예약 설정했고, 외출 후엔 습도를 확인했고, 벽지를 확인했다. 

습도에 굉장히 민감했던 여름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냈고, 벌레 박멸작전은 나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나중에 진정이 된 상황에서 돌아봤는데 움직이는 점들은 토토로에 나왔던 먼지 검댕이를 닮았었다.   

마크로 크로스케, 거기선 참 귀엽고 깜찍했는데...현실에선 끔찍했다. 


이런 일로 나의 '자취 일기'는 깔끔하게 끝이 났다. 

나 하나 먹여 살리자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 밥상을 차리는 일도 즐겁지 않았다. 

대신 간편하고 간단하지만 영양을 챙길 수 있는 식사로 대체했다. 오트밀, 견과류, 베리류, 요거트, 두부, 토마토, 사과 정도의 먹을거리가 냉장고를 채웠고, 그 외는 언니네 집밥 찬스를 이용 중이다. 자매란 그런 거지. 


이후로도 종종 나 혼자 사는 집에 벌레들이 찾아왔다. 

가장 잦은 출몰객은 책벌레(먼지다듬이)다. 

찾아보니 종이나 옷감을 갉아먹고 살지만 사람에게 해는 끼치지 않는 벌레라고 해서 

내심 안심은 했지만 그 생김새가 정말이지 미치게 징그러워 눈에 보이는 걸 그냥 두고 봐 지지는 않아서..

또 비오킬을 들었다. 주기적인 관리로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겠지. 

내가 자는 사이 어디에선가 책을 갉아먹고 있겠지. 그렇지만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내게 무해한 존재라면. 갑자기 나타나 나를 놀래키지만 않는다면, 

내 마음의 양식을 니가 조금 먹는 것이야 눈 감아 줄 수 있으니 같이 살아갈 수 있다고 노선을 정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야 어쩌랴. 너의 생활을 침범하지 않으리. 

그렇게 함께 살기를 택했다. 



올해 장마는 유독 긴 데다 그 기세도 무섭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따뜻해서 벌레의 습격도 심상치 않다고 한다. 

그래서 덩달아 긴장하고 있다. 

이 작은 오평의 평화를 지키는 데도 이렇게 많은 마음이 들고 공이 드는데

하물며 지구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려면....

나 혼자 살지만 다 같이 살아가야 하니까 일단 장보러 가기 귀찮아서 주문했던 

냉동, 냉장식품 택배부터 끊어보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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