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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Aug 13. 2020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오래전 나의 남사친 

가끔 뜻하지 않게 

이제는 다 지나간, 1년에 한 번이나 생각날까 말까한 일이나 사람이 일상에서 불쑥 고개를 들 때가 있다. 

그러면 빙긋 혼자 웃거나 사그라든 줄 알았던 분노가 치밀어 오르거나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하거나 그립거나 그중 하나다. 

그러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끝내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거나 

지인의 지인의 지인... sns를 타고 가서 근황을 확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걸 망설이다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그립고 보고 싶고 궁금한 마음까지만 허락되는 일과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향집에 다녀왔다. 

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에는 경전철 구간이 있다. 타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기분이 묘하다. 

지하철의 지상 구간과는 다르고, 서울의 풍경과도 다르다. 

눈앞에 펼쳐지는 낙동강과 너른 논밭, 낮은 건물이 모여 앉은 풍경이 서울과 같을 리 없다. 

그 장난감 같은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예전에 내가 살았던 아파트가 보이고, 그 건너편엔 공장지대가 보인다. 

습관처럼 눈이 갔고, 그곳에서 보았다. 노란기가 도는 건물 외벽 꼭대기에 붉은색 선명한 네 글자, 롯.데.리.아. 

그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아직도 있을 줄이야.  

그곳은 매장이 아니라 공장이었다. 

그 건물을 발견하는 순간, 떠오른 친구 하나가 있었다. 스무 살에 학교에서 만난 친구. 

그땐 없었던 말이지만 요즘 말로 그는 나의 남사친이었다. 


언제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갔던 여행지의 기억 속에 

그 친구가 늘 있었고,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메일 계정에는 그와 나눈 메일이 폴더명으로 저장돼 있다. 

서울에 와서도 가끔 만나 밥을 먹거나 전시장을 가거나 했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때마다 단 둘은 아니었고 또 다른 친구가, 혹은 친구들이 동행했다. 

우리는 친구였고 한사코 친구이기를 노력했다. 


그의 첫인상을 말해보자면 좀 노는 애, 였다. 빨간 바지, 염색머리, 이어링. 

그때는 90년대 중반, 아직은 20세기였던 때. 범생이과였던 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가까워지기를 젖혀놓고 시작한 관계. 하지만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됐다.  

가장 최초의 기억은 나의 스무 살 생일이다. 그때만 해도 다 같이 모여 동기들의 생일을 챙기던 문화(?)가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오글거리는 문화였으나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술자리를 만들고 싶었던 욕망이 낳은 문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나는 그날의 주인공이었고, 동기와 선배들 몇몇이 자리했다. 

초코파이를 쌓아 올려 케이크를 만들고 초를 밝히고, "00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스무 살 생일을 축하합니다..." 익히 불러오고 들어왔던 "생일 축하합니다~"와는 다른 축하노래를 하고 촛불을 껐다. 파도타기로 술을 한잔씩 비우고 나면, 아! 지금 생각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참석자들이 생일자를 위해 노래 한 곡씩을 불러야 했다. 20세기는 그랬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물론 거부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친구는 어쨌든 노래를 불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넥스트의 '인형의 기사'를. 왜 하필? 전혀 스토리텔링이 되지 않는 선곡에 솔직히 그는 살짝 음치이기도 해서, 내가 기억하는 것 같다. 


아, 맞다. 롯데리아! 그 얘길 해야 하는데. 

그 친구는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그 동네에 살았고, 내가 살았던 아파트가 살짝 언덕에 있어서 

내 방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면 그곳이 보였다. 붉은색 선명한 네 글자. 

그 친구가 어느 날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고, 나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집에 와서 밥이나 먹고 가라는 말을 했고, 그날이 왔다. 당연히 집에 나 혼자 있는 날을 잡았다. 생각해보면 가까운 패스트푸드점이나 밥집에서 만나 밥이나 먹었으면 될 일을 왜 그리 했을까. 납득이 잘 안 되는 일로 남아 있다. 어쨌든, 그가, 왔다. 


딩동! 


문을 열었고, 그가 들어왔다.  


안녕! 


몹시 어색하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척을 하느라 어색했던 그날의 분위기. 

나는 미리 주문해서 마치 내가 요리한 듯 세팅해 놓은 닭볶음탕으로 (지금 생각하면 메뉴 선정도 참 어색했다) 식탁을 차려두었다. 그리고는 마주 보고 앉아 맛있게 그러나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닭볶음탕 속 당면이 약간 불어서 툭툭 끊기는 게 신경 쓰였던 기억 말고, 그 뒤로 다른 기억은 없다. 

예상컨대 과일을 먹었거나 밥만 먹고 그 친구는 일을 하러 갔거나..둘 중 하나일 게다. 

(라면을 먹은 것도 아니니 다른 일이 있었을 리 없다.) 

이후 그 친구는 내 40명 동기 중 내가 살던 집을 방문한, 유일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친구는 그때 내가 만든 닭볶음탕이 맛있었다고 기억한다. 언제고 만나면 그날의 진실을 알려줘야지 싶다. 거짓말은 해로운 거니까. 


남사친과 여사친으로 설정된 관계에 대한 철석같은 믿음도 가끔 흔들릴 때가 있는 법이다. 

누군가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우는 때. 아마 닭볶음탕을 먹은 그날이 처음으로 내 마음이 기운 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번째 기운 때는, 어느 소나기 쏟아지던 여름. 

졸업을 하고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 무슨 일이었는지 그 친구와 나는 다니던 학교에 와 있었다. 

건물에서 나오는데 막 비가 쏟아졌고, 우산 하나를 펼쳤다. 

비 오는 날 우산 없고, 해 쨍한 날 우산 챙기는 걸로 유명(?)했던 나였기에 아마도 그 친구의 우산이었을 게다. 

작은 우산 하나에 두 몸을 욱여놓고 비를 피하려니 자연히 가까워져야 했고, 그 친구의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그것까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역시 어색했으나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 친구가 말했다. 

"왜 이렇게 말랐냐. 뼈가 다 잡히네.." 그때나 지금이나 내 어깨는, 내 어깨만은 항상 말라 있다. 

타고난 체형이라, 조카아이는 가끔 옷걸이도 걸리겠다 말할 정도로 뼈가 도드라져 있으니까.  

말랐다는 그 친구의 말에도 아마 실없는 말로 대꾸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 해보려 했겠지. 

우리는, 아니 그 친구는 모르겠고 그 무렵에 나는 조금이라도 관계가 달라질 기미가 보이면 완벽하게 차단했다. 로맨스는 1도 침범할 수 없도록. 그러나 결국 그 노력이 내 마음이 기울었다는 반증 이리라. 


한국인은 삼세번. 당연히 세 번째 내 마음이 기운 때도 있다. 

나도 그 친구도 고향을 떠나와 제 앞가림을 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던 30대 초반. 

가끔 메시지로 안부를 전하거나 더 가끔이지만 긴 이야기는 메일로 전하던 때, 한 통의 메일이 도착했다. 

마음을 고백하는 메일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 나도 아는 제삼자. 

알고는 있었지만 대놓고 물어보질 못해서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그 마음을 털어놓으며 힘들다는 말이었다. 

뭔가 그 관계가 잘 돼가지 않아서 괴롭고 힘들다는 그에게 나는 어떤 답메일을 보냈을까. 

보낸 메일까지 저장하는 치밀함은 없어서 그 답은 그 친구의 메일함에 있거나 혹은 아주 예전에 비워졌거나 둘 중 하나일 게다. 분명한 건 내 기억에는 없다는 것, 그 메일로 내 마음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것. 



그 친구는 결혼했다. 

휴식기 없이 연애를 하던 자라 '제삼자'와 이별 아닌 이별을 겪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이후로는 가장이고, 남편이고, 아빠인 그 친구를 가끔 아주 가끔 공식적인 모임에서 만났다. 

30대 중반이 되고, 40대가 됐고 이제 더 이상 결혼할 만한 친구가 거의 없으니 

내가 결혼을 해야 만날 수 있을까.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나 만날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그런 거라면 좀 더 한참이 지나 만나도 될 것 같다. 

큰비가 오거나 역병이 돌아도, 1년에 한 번 무슨 때를 핑계 대서 안부를 묻는 사이도 아니게 됐다.  

옛 여자 친구와도 친구로 잘 지내는, 누구보다 '관계'에 쿨했던 친구였지만 

나하고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아쉬움은 없지만 의아함은 남았다. 그러나 묻지 않기로 한다. 


그랬던 그 친구를 '롯데리아'가 소환했다. 

뜬금없이 '롯데리아' 앞에서 니 생각이 났다며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수도 있지만 

그 반가움은 나의 것이지 그 친구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나이가 들수록 나만의 사정으로 불쑥 상대의 일상에 등장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서 혼자 빙긋 웃고 말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만다. 그게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경전철을 타고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 친구를 생각했다. 

더 정확히는 그 친구와 보냈던 나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립긴 하지만 딱 그뿐,으로 마음의 매듭을 짓는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렀지만 혹하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불혹의 나이를 다 지나가고 시간이 '부록'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 무심히 전화해서 밥이나 먹자할 수 있을까. 

그때 만나면 추억의 메뉴 닭볶음탕을 맛있게 먹고, 

그때도 남아 있다면 붉은색 선명한 네 글자 그곳에서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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