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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평 Aug 17. 2020

잘 있지 말아요  

그립지 않은....사람

밤이었다.

핸드폰이 울렸고, 아는 번호였다.

그와는 오래 알고 지냈지만 친구라고 하기엔 내가 그를 어려워했고,

사귀는 사이라고 하기엔 나에 대한 그의 마음이 턱없이 모자랐고, 덤덤했다.

남몰래라고 쓰고 싶지만 실은 그도 알았다. 내가 그를 혼자 마음에 오래 담아두고 있다는 사실을.

'애인 있어요'라는 노래가 그 당시 나와 그의 관계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저 웃는' 사람이 나다.


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뭐 하니?"

잠 기운을 물리치고 내가 답했다.

"술 마셨네. 많이 마신 것 같진 않고...전화 왜 했어?"


그는 그 무렵 종종 한밤에 술에 취해 내게 전화를 하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거나 집에 막 돌아왔거나 하는 그런 순간에 말이다.

가족도 없고 마땅히 마음을 나눌 친구도 없는 타지에서 외로웠을 것이고,

가까이에 있지만 당장 자신에게 달려오지는 않을 '안전한 사람'인 내가 생각났을 것이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해도 될까, 술에 취해 전화를 해도 될까, 술이 깬 내일 아침에도 무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잠깐 망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에게 나는 쉽고, 안전한 사람이었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지만 끝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그에겐 나였다.


"나랑 잘래?"

그날 밤 그의 외로움의 종류는 평소와 좀 달랐던 걸까. 아니면 평소보다 술이 좀 더 과했던 걸까.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이내 대답했다.


"아니."

그도 나의 이런 답을 예상치 못했던 걸까, 잠시 침묵 후에

"그렇게 단호할 것까지야..그런데 왜에?"라고 물었다.


"싫으니까."

라고 다시 답을 하고 보니 취한 이를 상대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었고,

조금 짜증이 났다.

나를 한번 흔들어보겠다는 말에, 나는 너무 쉽게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나에 대한 화가 치밀기도 했다.

-못난이.


좋아한다도 아니고, 사귀자도 아니고 다 건너뛰고 나랑 잘래라니.

무슨 그 따위 말이 다 있나, 싶었다가 내가 그래도 여자로 보일 때도 있나 봐,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알도 없는 인간, 세상 둘도 없는 못난이.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있는데 그가 다시 밑도 끝도 없이 훅, 들어왔다.

"비겁한 000!.. 너 정말 비겁해. 알지?"

전화는 끊어졌다. 내가 먼저 끊었는지 그가 먼저 끊었는지는 기억해서 뭐하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담백하다 못해 성의 없는 한 줄의 메시지로 지난밤의 일을 사과했다.

[미안하다..]

누가, 더, 비겁한 걸까.


한동안 그의 그런 술버릇은 이어졌다.

그때마다 내치지 못한 건, '다시는 이런 전화 하지 마'라고 내가 말할 수 없었던 건

그가 정말 다시는 내게 전화를 하지 않을까봐, 겁이 나서였다.


그 시간이 꽤, 아주 길었다.

사.무.치.다.

그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천천히 잊어가거나 그렇게도 잊히지 않는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체념했다.


한동안 연락은 끊어졌고,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가 일하는 곳을 나는 알고 있었고, 그는 나의 근황을 몰랐으니 그에겐 놀라운 일이었겠으나

나는 '결국 만나게 됐구나' 였다.

그때는 한 번쯤 우연히 만났음 바라다가도 절대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두 마음이 매일매일 엇갈리던 때였다.


점심시간이었고, 나도 그도 각자의 동료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그가 나를 먼저 알아봤고, 반갑게 인사했고, 근황을 전했고, 곧 만나 밥이라도 먹자 하고 돌아섰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이 공수표일 때가 많지만 우린 정말 만나서 밥을 먹었다.

맥주도 한 잔 했나 그랬을 것이다.

그가 나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물었고 나는 '지금은 없어요'라는 누가 들어도 거짓말일 게 뻔한 답을 했다.

왜 그런 답을 꾸며했을까.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시간은 또 흘러서 어느 밤에 불쑥 그가 또 전화를 했다.

"뭐 하니?"


원고를 쓰던 중이었다.

"일하는데."


고생이 많다, 건강 챙겨라 이런 말 끝에 그가 "나 결혼해."라고 했다.

알고 있었다. 그의 결혼 소식은 그와 내가 같이 아는 지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으니까.

"알고 있어."  

"알면서 왜 축하한다 소리를 안 하냐?"

"....."


마음에 없는 말은 죽어도 못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도 예상했는지 웃다가 다음 말을 이었다.

"사귄 것도 아닌데..왜 옛날 애인한테 결혼 소식 전하는 것처럼 기분이 그렇지..이상하네."

사귄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그간의 모든 시간을 오해하지 말라고 내게 쐐기를 박는 말이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해야했다.

"축하해요, 선배. 근데 나 좀 바쁜데..결혼식이 언제랬지?"

정신 없는 밤이 지났고, 무사히 원고 마감은 했고, 얼마 뒤 거짓말처럼 그의 결혼식에도 다녀왔다.   

차마 하객으로 서서 사진까지 찍을 수는 없어서 일이 있다는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을 핑계대고  

바삐 결혼식장을 빠져 나와 혼자 1시간을 넘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날의 아픈 기억은 평소 신지도 않는 구두를 신어 발뒷꿈치가 홀라당까져서 몹시 아팠던 기억으로 대체돼 남아 있다.  기억에도 대체재가 있어서 참 다행이다.


시간은 또 흘렀다.

세상에 지지 않는 마음은 없다.

사무쳤던 마음도 시간 앞에서 색이 바랬고, 무엇보다 먹고사는 일이 버겁고 힘겨워서

내 마음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원고를 쓰고 있었다.

매번 그렇지만 시간은 모자랐고, 글로 채워야 할 공백은 많았고, 생각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 시간에 전화를 할 인간은 한 명뿐이다. 피디.

그런데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


받지 말까 하다가 혹시 일과 관계된 일일지 모르니 받기는 했다.

"네."

 

"뭐 하니?"


전화기 너머로 건너온 목소리에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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