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도 유리구두도 없이
잡채.
서로 다른 재료들이 한데 어우러져 좋은 맛을 내는 잡채처럼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좋은 창작을 하자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동의하고 말고 할 새도 없이 목판에 새겨 우리에게 온 이름, 잡채.
7년 아니 8년 전쯤?
국회도서관이 유리창 바깥 풍경으로 펼쳐지는 건물, 전망도 좋은 층수에 '공동 작업실'을 얻었다.
얻었다,라고 쓰지만 자의라기보단 나에겐 얼떨결에 이뤄진 무임승차 같은 거였다.
그래서 내내 빚진 마음이 한편에 남아 있었던.
그곳에서 마음을 맞춘 넷이 모여 공동창작을 시작했고, 우리의 작업물은 몇 차례 최종심에 올랐다.
처음엔 예상하지 못해서 얼떨떨했고, 두 번째엔 은근히 기대했다 실망했지만
세 번째엔 이제 곧, 금방 뭐라도 될 것 같았다. 그때의 분위기는 그랬다.
최종심 세 번이 어디 그냥 나올 수 있는 결과인가, 우리의 생각은 그랬다.
조금만 더 운이 좋았어도, 같은 마음. 실력보다 운을 탓하며.
같이 한지 1년이 됐을 무렵, 우리는 셋이 되었다.
더 좋은 일, 더 행복한 시간을 위해 한 명의 그녀가 떠났기 때문이다.
남은 셋은 계속했다. 신이 났었다.
철마다 같이 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도 다녔다.
그러나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쓰고 썼으니까.
그렇게 한 해 두 해를 보내면서 우리는 지쳐가며 또 깨달았다.
뭐라도 되는 건 쉽지 않은, 빠른 시간에 이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았을 땐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뒤였다.
그러는 사이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다 결국 우리는 지금,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마지막 모임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우리의 단톡방에 톡이 울리지 않은지도 오래다.
오늘 밤 내가 한 번 울려볼까, 몇 번 단톡방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결국 침묵 속에 두기로 했다.
다들 각자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있을 테니까, 나만 아직 돌아가질 못해서 헤매고 있을 뿐이니까.
나는 호박마차를 놓쳤다.
12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타고 왔던 호박마차를 타고, 화려했던 파티는 잠시 꾼 꿈인걸 깨닫고
다들 현실로 돌아갔는데 나만 호박마차를 타지 못했다.
타이밍의 문제였던 걸까.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렇게 돼 버렸다.
돌아간 그는 가정을 지켰고,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돌아간 또 다른 그는 제 앞날을 돌보기 시작했다.
머지않은 미래의 삶에 평온과 안녕을 선물하기 위해 기꺼이 현실을 내주겠다 다짐한 듯
열심히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인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남았다.
화려한 드레스도 유리 구두도 다 사라져 버려서 파티가 열렸던 저 성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돌아갈 호박 마차도 없이 그렇게 남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오래오래 막막하고 캄캄할 것 같은데 성문은 굳게 닫혀있고, 호박마차는 올 기미도 없다.
여기 앉아 드레스를 짓고, 유리구두를 만들어 입고 신고 성 안으로 들여보내달라 소리를 쳐보든지
호박마차를 만들어 타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든지
둘 중 하나다.
뭐가 됐든 쉽지 않은 게 함정이긴 하지만, 이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왕자님은 내 차지가 아닌 걸 나는 벌써 벌써 알고 있었으니까.
"winter is co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