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나의 여름은 시원했다
어제까지 문제없이 작동하다가 오늘밤에 멈춰버린,
이제 겨우 입주 2년차 천장형 시스템 에어컨의 고장은 한여름밤의 날벼락이었다.
AS 신청을 하고 받은 답은 가장 빠른 방문일정이 9월 2일이라는 것과
그 사이에 취소자가 생기면 일정이 조금 빨라질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며칠이 흘렀고, 나는 퇴근해 돌아온 저녁마다
혹시나 행여나 어제 되던 게 오늘 안 된 것처럼,
어제 안 되던게 오늘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맘으로 에어컨의 리모컨 전원을 몇 번 껐다 켰더랬다.
그렇게 2~3일이 흐르고, 설마 9월 2일에 올까하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한 번 더 전화를 해서 상담을 했고, 같은 답을 들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이런 경우 어떻게 마냥 기다리겠냐고, 9월 2일이면 가을이라
켜던 에어컨도 끄는 계절이라고....한탄을 해봐야 상담원이 내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메뉴얼대로 대응하는 수밖에. 고객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지만 저희로서도 방법이 없다,
그러나 담당기사님께 한번 더 말씀은 드려놓겠다...그 말밖에 달리 해 줄 말이 있을까.
항의글을 써봐야 그게 다 어디로 가겠는가.
에어컨 수리 인력의 밥먹는 시간을 뺏고, 잠을 뺏고, 주말을 뺏는 일이 될 게 뻔했다.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 여름을 견뎌보기로. 그래봐야 집에 온전히 있는 시간은 주말과 휴일일 테니
서너번의 주말과 휴일을 견디면 이 여름이 물러갈 것이다, 라고.
그렇게 첫 번째 주말을 맞았다.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리고 다림질을 하는 주말의 스케줄.
선풍기도 켜지 않은 채 그 열기와 습기를 견디면서 어느 한때의 여름이 생각났다.
나는 세탁소집 셋째 아이였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양복점집 셋째 아이였다가
기성복이 등장하고 옷을 맞춰입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면서 어쩔 수없이 찾아온 변화였다.
커다란 컴퓨터형 세탁기가 들어왔고, 석유계 용제 냄새가 익숙해지던 시절.
부모님은 한여름엔 이른 아침에 다림질을 했다. 거대한 스팀 다리미였는데, 공업용 다리미가 아니었나 싶다.
압력계 바늘이 어느 정도 수치를 찍으면, 다림질이 시작됐다.
엄청난 열기와 습기가 공간을 메웠다. 부모님은 연신 땀을 흘렸다.
선풍기의 강풍이 날려줄 수 있는 열기가 아니었다.
입고 있던 옷이 축축하게 젖을 때면 작업이 끝이 나곤 했다.
다리미의 무게는 또 어땠나. 2킬로그램은 될 법한 무게였다.
그무렵 해마다 여름이면 엄마는 피부질환을 앓았는데, 팔다리에 벌건 열꽃이 피고 가려운 증상이었다.
피부과에 가면 스테로이드계 연고와 약을 처방해주었는데, 그 약의 부작용으로 얼굴이 부었다.
아마 그 피부질환은 석유계 용제와 한여름의 열기와 습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렇게 길고긴 여름이 지나면 열꽃은 사그라들었고, 가을이 왔다.
그때는 몰랐던, 그 여름의 고됨이
고작 셔츠 몇 장을 핸디형 스팀 다리미로 다리면서 떠올랐다.
나는 지금도 세탁소에 쉽게 옷 세탁을 맡기거나 다림질을 맡기지 못한다.
뭐랄까, 어떤 죄책감 같은 게 있다.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그렇다.
그리고 뭔가 잘못된 게 있어도, 분쟁이 생겨도 따지고 들지 못한다.
어릴 때 봐왔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
친구 하나가 세탁소에 옷을 맡기고 큰 문제가 생겨 한 소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불같이 화를 냈다.
내 보기에 '사소한 문제'였고, 그건 '악다구니' 였기 때문이다. 물론 입장차이다.
엄마가 여름을 어떻게 나고 있냐고, 덥지 않냐고 전화를 해왔다.
에어컨 켜고 시원하게 있으라는 말에 차마 에어컨이 고장났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다림질 중이라고 했더니, 더운데 뭣하러 그걸 하냐고, 세탁소에 맡기라고도 한다. 엄마는 그렇다.
그 긴긴 한여름의 절정을 보내면서도 선풍기 바람을 자식들에게 돌려세우는 사람.
덕분에 나의 여름이 늘 시원했던 걸 이제 알겠다.